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콤달달 Dec 30. 2023

계절마다 양말을 삽니다

양말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건 새해가 밝아온다는 뜻이다. 보낸다고 아쉬울 것도 새로 맞이한다고 들뜰 것도 없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2023년을 보내는 중이다. 새 달력을 받으면 제일 처음 확인하는 게 공휴일이다. 그중에서도 명절은 가장 먼저 찾아보게 된다. 명절 수당이 들어오기도 하고(지금은 휴직이라 아니지만) 명절에 모일 가족들에게 줄 선물도 미리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준비하는 선물 목록에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양말. 양말은 가격적으로 부담이 없으면서 실용성은 높은 아이템이라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는 선물이다. 선물 받을 사람이 양말이 많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누구든 언젠가는 새 양말이 필요한 날이 오니까.


첫째 아이가 패션에 관심이 많아진 건 올해 병설유치원 입학 이후부터이다. 그전까지는 엄마인 내가 입으라는 대로, 신으라는 대로 꺼내주는 옷을 입었는데 어느 날부터 아침에 옷을 꺼내주기 전에 스스로 찾아 입기 시작했다. 급기야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다음 날 입을 옷을 입고서 자더니 나중에는 양말까지 신고 자는 게 아닌가. 양말 신고 자면 답답하지 않냐고 해도 소용없고 옷을 입고 자면 옷이 구겨진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일주일치 코디를 미리 머릿속으로 정해두어서 어떤 날은 이것 때문에 큰 소리가 나기도 한다. 날이 더운데 긴 청바지를 입겠다거나 날이 추운데 얇은 면바지를 입겠다는데 그냥 내보내는 엄마가 몇이나 되겠는가.(잘 때는 잠옷을 입는 걸로 최종 합의를 했다. 양말도 벗고. 아니면 잠옷을 다 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긴 했지만)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는 법이 없다. 그날 입는 옷과 깔맞춤이 기본값이다. 상의가 보라색 후드이고 바지가 검은색 카고 바지이면 양말은 보라나 검정이어야 하고 흰색-하늘색-진초록 삼색 맨투맨에 카키색 조거팬츠를 입는 날에는 초록색 양말을 신는 식이다.(초록색이 없으면 상의에 있는 흰색이나 하늘색 양말도 무방) 계절마다 아이의 양말을 사는 이유이다. 옷의 두께와 색감이 달라지면 양말도 달라질 수밖에. 어떤 날에는 윗도리, 바지, 양말을 모두 핑크로 통일하기도 하는데(요즘은 검은색의 무채색 계열 옷에 빠져있어 극히 드물긴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를 핑크돼지룩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패션에 심취해 있는 아들에게 남편이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다. 아빠도 엄마가 입으라는 대로 입는데 아들 너는 대체 누구를 닮은 거냐고. 아빠가 아니니까 엄마겠지? 아이의 대답에 고등학교 입학식날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삭스탑'이라는 양말 가게가 읍내에 생겼다. 양말은 흰색 아니면 검은색 일색으로 땀을 흡수해 주는 용도로만 여겨왔던 내게 양말도 패션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이 브랜드의 티브이 광고는 꽤나 신선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양말 전문 가게라니. 작은 가게 안에는 다양한 색의 예쁜 양말이 가득했다. 아니, 양말만 가득했다. 무늬도 색도 길이도 다양한 양말들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마음에 드는 양말 한 켤레를 골랐다. 가격 4,000원. 엥? 4,000원? 무릎 아래까지 오는 반양말은 7,000원이었다. 시장에 가면 2,000원에 10켤레 묶음을 살 수 있는데 한 켤레에 4,000원이라니, 7,000원이라니. 예쁘긴 한데 너무 비쌌다. 첫날에는 양말만 만지작 거리다 그냥 나왔다. 양말을 제자리에 걸어두면서 못내 아쉽던 마음이 선명하게 남았다. 읍내에 갈 때면 팬시점을 거쳐 싹스탑 매장에 갔다. 결국 돼지저금통 배를 갈랐다. 두 켤레를 사서 그중 하나를 고등학교 입학식에 신고 갔다. 아무도 내 양말에 관심을 두지 않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새신을 신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더랬다.


양말은 겉모습을 치장할 때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영역이다. 어둡고 축축한 신발 속에 감춰진 채로 하루종일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자칫 소홀해지기 쉬우나 반대로 양말까지 신경 써서 신는다면 옷을 잘 입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다. 옷뿐만 아니라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학교, 남들이 그럴 듯 한괜찮은 직장, 남들이 보기에 부러워할만한 자동차와 집.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거 말고 숨겨지고 감추어진 나는 어떠한가. SNS에 사진 속 행복해 보이는 내가 아닌 현실에서의 나는 행복한가. 아이에게 배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아이가 옷을 입는 기준이 자기자신, 자기만족이라는 거다. 한여름 남들이 보기에 더워 보이는 청바지라도 내 멋에 입고 싶은 마음. 빨간 양말인지 파란 양말인지 남들은 신경 쓰지 않지만 패션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신중하게 양말을 고르는 자세. 그러면서도 엄마의 설득에 청바지 대신 반바지를 입고선 엄마 말 듣기 잘했다고, 안 그랬다면 더워서 찜통이 될 뻔했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유연함.


새해에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양말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새 해라서가 아니라 이런 다짐은 매일 해도 모자라니까. 또 다짐은 새해에 하는 게 제격이니까.




이전 07화 제주 눈 안 온다며, 안 춥다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