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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Dec 02. 2023

덕심이 세상은 구하지 못할지라도

김동률

지인이 SNS에 비행기 티켓 사진을 올렸다. 홍콩행이었다. 가족여행 가냐고, 잘 다녀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BTS 멤버 슈가의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했다. ‘아 맞아, 아미(BTS 팬클럽)였지.’ 나는 답신을 보냈다. <그런데 아무리 아미라고 해도 그렇지. 학교 다니는 아들이 둘이나 있는 애엄마가 아이돌 콘서트 보러 홍콩까지 간다고?> 그리고 바로 덧붙였다. <너무 멋있잖아!!!> 부러운 마음은 담겼으나 질투나 비아냥, 비꼼의 의도는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칭찬이었다. 애정하는 가수를 보러 홍콩까지 날아가고야 마는 그녀의 열정과 실행력에 멋있다는 표현 말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BTS에 진심이고 진심은 지나온 시간에 기인한다. BTS가 방탄소년단이었을 때부터, RM이 랩몬스터였을 때부터이니 그녀는 한 아이돌의 탄생과 성장, 성공 모두를 지켜본 터, 호기심이 팬심으로, 팬심을 넘어 덕심으로 발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장 있어 보이는 건 무엇보다 경제력이었지만 그보다 빛나는 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는 그 마음이었다.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이 발산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채도가 분명한 원색처럼 쨍하고 빛나는. 가만히 있어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달까. 나는 무채색에 가깝다.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없지만 덕질에도 소질이 없다. 엽서를 천 장 넘게 모아본 적도 있고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 CD를 사들이기도 했지만 엽서들을 어떻게 처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CD들은 여러 번의 이사 끝에 잃어버렸다. 좋아하는 건 많은데 좋아하는 걸로 끝인 경우가 많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압도적이지 않고, 필라테스는 하다 말다를 반복하다 5년 넘게 쉬고 있으며 앤티크 커피잔은 모으다 시들해졌다. 와인을 즐겨 마시긴 하는데 남들에게 추천해 줄 정도로 빠삭하지 않고 매일 마시는 커피 역시 라떼면 다 괜찮을 뿐 선호하는 원두 같은 건 없다. 무난하다면 무난한 거지만 심심하고 흐릿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해 본다면 ‘매력 없음’이 분명하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고, 빠져든다는 건 나의 마음과 시간과 돈을 들인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무엇이든 오래 지속할 수 있다. 걷겠다는 마음과 걸을 시간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은 걷기에도 운동화는 필수니까. 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할 때에는 돈과 마음이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주말에도 수업이나 과외가 잡히면 도통 뭘 하기가 어려웠다. 공무원이 되고 나니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도 여전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과거형으로 썼지만 여전히 돈이 없다...) 드문 경우이겠고, 나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시간과 돈이 넘칠 정도로 많아도 세상 모든 것에 흥미가 없다면, 무언가에 사로잡히거나 매료되는 경험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건 다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에 무관심하며 방치하고 있던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봤다. 걷고 싶다면 아무 신발이나 신고 문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었는데 정해진 시간과 나이키 운동화가 필요하다면서 스스로 걷지 않을 구실을 만들고 있는 내가 보였다.


가수 김동률 님 콘서트를 다녀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2009년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무려 14년 만이었다. 콘서트를 자주 하지 않는 가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간 콘서트가 아예 없지도 않았는데 14년 동안 나는 그를 잊고 지냈다. 김동률 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 3학년, 오빠가 고등학교를 타지로 가면서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을 때였다. 주말에 오빠가 오거나 겨울이면 난방비 때문에 다시 부모님과 함께 자야 했으므로 온전한 내 방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데 기뻤던 날들이었다. 오빠가 쓰던 방에서 가장 좋았던 건 카세트테이프와 CD를 재생할 수 있는 스테레오였다. 가지고 있는 테이프가 별로 없어서 라디오를 더 많이 들었는데 하루는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들어보라고 테이프 하나를 빌려주었다. ‘전람회’ 1집이었다.  


이젠 버틸 수 없다고... 묵직한 목소리가 선율을 타고 흐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가지는 힘이 있다. 전람회라는 그룹은 생소했지만 시인듯 노래인 듯 모든 노래가 마음을 울렸다. 가사지를 보니 안경을 낀, 잘생긴 김동률 님이 있었다. 내가 안경에 대한 동경이 생긴 것도, 마음에 품었던 남자들이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도(남편 역시 안경을 낀다) 모두 김동률 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첫눈에 그에게, 그의 목소리에, 노래에 반했다. 또래 친구들은 H.O.T나 젝스키스를 좋아할 때라서 전람회를 좋아하는 내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나는 너희들과 차원이 달라.' 뭐 그런 마음.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고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그런 유치함이 그립기도 하다.(그립다는 거지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친구에게 테이프를 돌려준 뒤 나는 돈이 생기면 모았다가 전람회 CD를 샀다. 그 유명한 ‘취중진담’을 들을 때에는(전람회 2집에 실려있다.) 내게도 누군가 이런 고백을 해오는 날이 오겠지 싶었다.(현실은 노래가사와 달랐지만) 전람회가 3집 <졸업>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때부터는 김동률 님의 팬으로 이십 대를 보냈다.


그렇게 좋아했던 그를 30대를 지나는 10여 년 동안 잊고 지냈다니 놀랍다. 사실 그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수험생활에, 결혼에 출산까지  흘러가는 시간에 정신없이 휩쓸리다 보니 그런 거라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콘서트 소식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좀 더 오래 그를 기억 속에 묻어두고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콘서트에 가는 길은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일단 티켓을 구하는 것조차 난관이었다. 피 튀기는 티켓팅이라고 해서 '피켓팅'이라 불리는 티켓 예매는 아이돌 한정이겠거니 했는데, ‘김동률 님은 아이돌이었던 것이었다.‘ 티켓 오픈 시간엔 아예 접속이 불가능했고 이후 아기를 돌보는 틈틈이, 아기를 재우고 새벽마다,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클릭을 하고 또 했지만 매번 꽝이었다. 광란의 클릭질로 손목이 없어질 지경이었지만 보람도 없이 어쩌다 잡힌 좌석은 "다른 사람에 의해 예매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졌다. 다들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가 있는지, 인터넷이랑 노트북을 바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해도 티켓 가격의 두 배, 세 배나 주고 암표를 살 수는 없었다. 간절함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고, 건전한 공연문화를 위해 없어져야 할 악행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인터넷 중고거래 카페에서 "정가양도"라는 네 글자를 보았을 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했다. 티켓을 파는 사람은 더 좋은 자리를 확보해서(이건 ‘취겟팅’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취소된 티켓 붙잡기.) 이전 자리를 양도하는 거고, 티켓을 취소하지 않는 건 취소수수료(4,000원) 때문이라고 했다. 중고거래는 아무래도 사기의 위험이 있어 조심스럽다 보니, 안전결제 시스템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티켓이 배송되기까지 한 달 이상이 남아있어서 판매자는 바로 입금을 원했다. 판매자의 판매 이력과 계좌가 사기에 연루된 적이 있는지 등을 확인한 후 돈을 보냈다. 남편은 100% 사기라며  경솔했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실물 티켓을 두 손에 받아 들 때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지만 티켓은 안전하게 배송되었고, 판매자는 그저 나처럼 김동률 님의 팬이었다.(남편이 틀렸다, 음하하하) 공연을 보기까지 다른 도움도 받았다. 둘째는 친정에서 엄마가 봐주셨고 첫째는 남편이 전담했다. 남편과 아이는 공연 시간 동안 롯데월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첫사랑을 만나러 간대도 이렇게 설렐 수 있을까. 정가양도, 엄마 그리고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떨리고 벅찬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전 공연, 전석 매진을 기록한 만큼 입장부터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공연장에 모인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한 사람을 보기 위해 모였다는 점이 묘한 동질감과 동지애를 불러일으켰다. 응원봉과 사진 촬영을 일절 금지한다는 사전 공고에 팬들이 응답하며 성숙한 팬심을 보여주었다. 빛과 음악과, 목소리와 김동률로 꽉 찬 두 시간이었다. 애써 기억해내려 하지 않아도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들이 자동 출력되었고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뜨거웠다. 잊고 지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나는 그를 좋아했던 십 대, 이십 대의 시간으로 소환되었다. 음률을 타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취한 듯했고 춤을 추고 있지 않았지만 흥이 차올랐다.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발라드였음에도.


살아있는 동안 심장은 멈추지 않지만 매 순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감각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숨 쉬는 게 당연해지고, 심장 뛰는 소리에 무감각해지면서 삶을 응당 주어지는 것으로, 가볍고, 사소한 것으로 여긴다. 가끔은 삶이 버겁다고 느끼고 언제든 나의 의지대로 중단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나도 다르지 않다. 입만 열면 불평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행 배틀에 나를 선수로 세워두곤 한다. 공연을 보는 동안 심장이 이렇게 힘차게 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고마웠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를 위해(물론 팬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으므로, 다음 콘서트에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건강하게, 내 자리에서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야겠다고 다짐 했다. 덕심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 하겠지만 나 하나쯤은 구하고도 남는다.


콘서트 이후로 가을을 지나 겨울이 왔다. 가을엔 가을 옷, 겨울엔 겨울 옷을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준비했지만 내 몫은 사지 않았다. 콘서트에 가느라 티켓, 호텔 비용 등 지출이 컸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으니 과감하게 옷을 포기하기로 했다. 감격의 여운이 아직 식지 않았으니 남아있는 온기를 연료 삼아 이 겨울 따뜻하게 지내보련다. 11월을 하루를 남기고 <옛 얘기지만> 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디지털 싱글로 발표 되었다. 뗄감까지 채워 주시는 다정한 김동률 님. 12월, 우리 집에는 캐럴 대신 그의 노래가 흐르고 있고, 무채색이었던 나는 ’김동률‘이라는 색으로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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