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그 좋았던 시간이 끝났다. 가을 말이다. 여름엔 너무 더워서 산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아기와 함께 걸었다. 낙엽 위를 유아차가 지날 때 들리는 바스락 소리가 아기에게도 들리겠지?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아기도 보고 있으려나? 아가, 저건 버스란다. 엄청 크지? 봄에만 꽃이 피는 게 아니야, 가을에 피는 꽃도 있지. 바람이 참 시원하구나. 햇살이 눈부시니? 아기와 함께 걷는 길마다 가을빛이 다채롭게 물들었다. 샘 많은 겨울이 온화한 가을의 자리를 뺏어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누려야지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산책을 못 나간 지 며칠 째이다. 낙엽이 진 자리에 꽃봉이가 올라오고, 단풍이 들었던 잎사귀마다 초록으로 물들 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풍경을 눈에 담는 것 말고도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령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엄마들의 마음 같은 거. “안녕하세요.”, 낯선 이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유아차를 사이에 두고. ”아기가 귀엽네요. 몇 개월이에요?“ 서로의 아기에게 호감을 표하기도 하고 “그렇죠, 힘들겠어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육아 고충에 진심어린 공감을 전하기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건 각자의 두 손에 꼭 쥔 유아차 덕분이다. 걷고 있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첫째냐 둘째냐, 남자냐 여자냐 몇 마디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저는 되돌아가려고요. “ ‘네, 저는 이쪽으로요. 안녕히 가세요.” 쿨하게 헤어진다. 서로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눈빛에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로서, 아기 엄마로서.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에는 많이 걸어 다녔다. 혼자서. 오후 4시 30분에 퇴근을 하고 나면 운동화로 갈아 신고 반포 한강공원으로 갔다. 강서에 있는 집까지 한강 공원을 따라 걸었다. 4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라서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곤 했는데 한강 둔치에서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는 구경하느라 더 늦게 집에 간 적도 있다. 남자친구는 제주에 있었고, 시간은 많고, 약속은 적은 때였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키우면서는 그렇게 혼자서 오래 걸어본 적이 없다. 노을이 드리운 한강,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던 사람들, 돗자리를 깔고 앉아 맥주를 마시던 무리들이 있었고, 걷는 내가 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유로움과 해방감으로 충만했던 시간들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두 발로.
유아차를 끌고 다니면 보행자로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감정과 마주할 때가 있다. 둘째가 6개월쯤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낳은 지인 가족과 모임을 위해 평소에 자주 갔던 양식당에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어른 4명, 아이 2명, 유아차에 타고 있는 아기 2명 총 8명이 조용하게 식사할 별도의 공간이 있는 것을 알고 한 전화였다. 내가 출산하고 양육하는 동안 레스토랑은 자리를 옮겨 영업을 하고 있었다. 룸 예약은 가능하나 엘리베이터 없는 2층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자면 엄마들이 아기를 안고 아빠들은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올라야했다. 유아용 식탁을 이용하기에는 아기들이 아직 작을 때여서 유아차가 필요했던 우리는 가고 싶던 양식당 대신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유아차를 동반하기 위해서 맛 대신 편의를 선택한 것이다.
인도 혹은 횡단보도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 때문에 보행자인 내가 유아차를 끌고 차도로 걸어가야 할 때, 1층에 있는 상가인데도 출입구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턱에 걸려 유모차가 넘어질 뻔할 때 불편을 넘어 당혹감이 몰려온다. 고작 유아차를 밀고 다닐 뿐인데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기분이 든다. 제발 유아차를 끌고 나다니지 말라고, 그냥 집에 있으라고.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이 부정적인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차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발로 걸어 다닐 때에는 느껴본 적 없는. 첫째를 키울 때에도 유아차를 끌었고 같은 불편을 경험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자랐고 유아차가 필요 없게 되면서 나는 불편한 감정을 잊고 지냈지만 불편함, 그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회는 대다수에게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이 소수에 속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가 된다. 나는 생애 대부분을 다수의 영역에서 살았고 유아차를 끄는 동안 소수의 영역에 머물 뿐이지만 절대다수, 절대 소수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고, 머지않아 노인이 될 것이며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수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공공연해지고, 당연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수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생활환경이 개선될수록 다수의 삶의 질도 동반 상승한다. 일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모두의 편리를 위해 개선이 필요하다. 다수와 소수의 개념이 사라질 때 모두에게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