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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mish May 16. 2020

너는 궁 터에 자리잡은 커다란 고래였다

이층 집에서 세 걸음

너는 궁 터에 자리 잡은 커다란 고래였다.


집에는 늘 한 달 단위의 커다란 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 늘 가족의 일정들을 적어놓았다. 한 달이 지나면, 그 달의 부분은 찢어 버렸다.


내가 주목한 것은 달력의 새하얀 뒷면이었다. 나는 그 과정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찢은 종이를 달라고 하였다. 종이는 거의 1절지 정도 되는 큰 크기였는데, 나는 그 달력의 뒷면에 온갖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아이를 그리는 것.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치장을 끝내고 나면 그 옆에는 친구를 만들어준다. 처음엔 소소한 일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가, 소녀의 손에 긴 검을 쥐어주는 순간 모험극으로 변한다. 무성한 숲을 지나 저 멀리 거대한 산이 보인다. 달려 나가려는 찰나, 주변에서 작지만 용감한 난쟁이들이 소녀를 도와주기 위해 모여든다. 함께 손을 잡고 발을 떼는 순간, 독기를 머금은 커다란 뱀과 털북숭이 괴물들이 길을 막는다. 한 명의 어린 소녀가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더 큰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한 장의 큰 종이와 볼펜 한 자루면 충분했다.




이면지를 잔뜩 모아 메모지를 만들기도 했다. 커다란 이면지를 자르고 잘라서 앙증맞은 사이즈까지 만들고 나면 스템플러로 콕 찍어 하나의 메모지를 만들었다. 정작 본인은 그런 메모지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다 엄마에게 선물해주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린 꼬맹이가 왜 그렇게 알뜰살뜰 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은 욕구가 컸기 때문에, 줄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소설을 읽으면 소설을 쓰고 싶었고, 만화책을 읽으면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각적 심상을 글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연습장 대부분은 어눌한 콘티로 가득했다.

그림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하게도, 부모님이 이것저것 시켜보는 와중에 발생했다.
몇 번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공부방을 다녀본 뒤로, 지니 언니의 그림을 보고 비교해가며 열심히 그렸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어느 날 할머니가 내 그림을 보고 아주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한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저 상상을 표현할 놀이였던 그림 그리기가, 재능이 있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내가 피아노를 쳤으면 하는 아빠의 강한 바람에 따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자의적인 취미가 아닌지라 여간 따분한 게 아니었다. 아빠의 바람이 강요처럼 느껴진 탓도 있다. 그 뒤로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엄마를 계속 졸라댔고, 나의 길은 그림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선택한 분야이기 때문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과, 화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할아버지는 배고픈 직업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늘 안타까워했지만,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자신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고 싶다고 엄마를 졸라댔지만, 정말 ‘배우기’ 시작한 건 10살이 되고 나서였다.

어느 날, 내 영향을 받은 다니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확실히 둘째들은 첫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고 생각하지만 나는 왠지 그게 싫었다.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독자적으로 찾았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었고, 내가 없었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사실 그 어린 마음엔 내 영역을 침범당한 기분도 한 몫했다. 하여, 매번 단호하게 넌 그러면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다니가 얼마나 억울했을까 싶다. 결론을 말해주자면 나는 디자이너가, 다니는 개발자가 되어 일하고 있다.

천 원짜리 무지 스프링 노트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나를 흥미롭게 하는 무엇이든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나는 나체의 여자와 남자도 그렸었는데, 서로 너무 사랑해서 껴안고 있는 설정이라는 확실한 주제도 있었다. 엄마 아빠를 비롯한 누구에게도 비밀을 만들지 않았던 나이라, 나는 그런 걸 끄적끄적 그리다 잘 때쯤 거실 테이블 아래 두고 자러 가곤 했다. 한 번은 잠들기 직전에 엄마와 아빠가 그 그림 공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 그거 좀 야한 건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겁이 났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인체를 제대로 알고 있네.”

그런 얘기뿐이었다. 우리 딸이 잘 그리는 것 같긴 하다고. 의외이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말 다행이었다. 누군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주저 없이 내 생각을, 내 상상을 펼칠 수가 있었다는 것. 

물론 엄마 아빠에게 쫑알쫑알 그리는 내용에 대해 다 설명하진 않았다. 들어주는 존재는 꼭 사람일 필요가 없었거든.




이층 집은 나의 상상 속 고래가 되어 궁 터에 안착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고래이겠지만, 당분간은 푹 쉬다 갈 것처럼 느긋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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