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mish May 24. 2020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층 집에서 네 걸음


다니가 혈기왕성하게 뛰어다니기 전까지,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다니를 업고 외길 끝까지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온 가족이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하나 둘 모일 시간에, 할아버지는 항상 밖에서 들어오셨다. 


그러곤 주섬주섬 다니를 내려놓고 식사를 하러 오셨다. 나는 호기심에 딱 한번 따라가 보았다. 무척 졸렸지만 아침마다 어딜 그렇게 가시는 건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그날은 안개가 자욱하고,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6시였다.



다니가 추워하진 않을까요? 물어봤지만 할아버지는 그럴 리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다니는 꽁꽁 싸매진 상태로 얌전히 할아버지 등에 업혀 있었다.


“다니가 기분 좋아할까요?”


나는 할아버지가 다니만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대를 이어갈 남자아이였으니까. 어린 나이에도 그 개념을 알았다. 멱살 사건의 경우도 다니와 얽혀있었다. 


할아버지가, 다니가 곤히 자야 하니 비키라고 했지만 나는 귀여운 아기를 계속 보고 싶었다. 몇 번을 말해도 듣지 않자 화가 난 할아버지는 나를 거칠게 끌어올려 치워 버렸다. 충격적이었고 서러운 순간이었다.


“바깥바람을 쐬어야 건강해지지. 신선한 공기도 많이 마시고. 너 어렸을 적에도 이렇게 매일 업고 산책을 나왔다.”


서러운 순간을 회상하고 있던 내게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기억 안나는데. 라는 말에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웃었다.




이층 집의 아래층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모든 가족을 수용할 만큼 넉넉하다 보니 그만큼 개방적이었고, 자주 모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어난 많은 이들은 비밀 없이 모두에게 보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각자의 시선은 각자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이를 테면 할아버지에게 내가 멱살이 잡혔던 날. 장소는 아래층 거실이었고 모두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훗날 무니는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 기억이 또렷하다고 말했다. 충격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빠에게 혼나던 날도 어김없이 아래층 거실이었고, 주변에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 날 나는 빙글 뱅글 제자리에서 도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빠는 혼을 낼 땐 항상 목소리를 세상 무겁게 가라앉혀 분위기를 잡았다. 


조곤조곤 목에 힘을 줘 경고했기 때문에 잔뜩 쫄은 나는 알아들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곤 위층에 올라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그것이 아빠의 눈에는 여전히 빙글 뱅글 놀이를 멈추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결국 혼이 났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빠는 다정하다가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는 아빠가 언제 다정해지는지, 언제 무서워지는지 알기 어려웠다. 새삼 눈치도 많이 봤던 것 같다. 스스로가 나약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에게 나의 생각을 조목조목 말하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억울해도 참는 방안을 택한 적도 많았다.



아마 어른들은 아이의 그런 선택마저 알고 있었나 보다. 얼마 후 할아버지가 입을 연 것이다. 놀이를 계속 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튼 것이었다고, 너는 네 아빠에게 정확하게 말을 했어야지. 하고 말이다.


우선 모를 거라 생각했던 할아버지가 내 억울함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그렇게 똑부러지게 말할 만큼 어휘력이 상당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의도적으로 경고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억울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 짧은 순간 고민하다 그저 혼이 나고 말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을 틀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아빠는 이해했겠지만, 당시 나라면 ‘그게 아니구~’만 반복하다 더 혼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합리화일지언정, 그 와중에 아빠가 왜 그렇게 이해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다만 최선을 다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뭐 그런 덕에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정리하려는 습관이 생긴 것이니 좋은 걸까.






이전 03화 너는 궁 터에 자리잡은 커다란 고래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