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의 어머니
남자친구와 통화를 할 때면 가끔 그의 어머니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지는 순간, 남자친구의 목소리는 더 작아졌고 대화는 단절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의 이런 반응이 단순히 신경이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 본능에 가까운 것임을 깨달았다.
“엄마는 참았던 화를 꾹꾹 눌렀다가 한 번에 폭발하거든.”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집에서 통화를 할 때면, 그는 말끝을 흐리거나 전화기 가까이에 입을 붙여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나는 왜 그가 그렇게까지 눈치를 보며 말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단순히 화를 내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반응일까, 아니면 더 깊은 무언가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반응은 단순한 불편함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어머니의 분노에 직면할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억눌린 감정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공격적인 표현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어떤 연약함을 건드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것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만 생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날, 통화 중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녀의 고함 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렸고, 나는 놀란 나머지 통화를 끊어버렸다. 곧 다시 걸려온 그의 전화를 받고 숨을 고르며 물었다. “엄마랑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가 샤워를 안 해서... 엄마가 몇 번 씻으라고 했는데도 안 했거든. 그래서 엄마가 참았던 분노를 한 번에 터뜨린 거야.”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이 불러온 결과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자책과 무력감이 뒤섞여 있었다. 사소한 이유로 터진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단순히 화를 피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학습된 무력감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반복된 비난과 분노에 노출된 이들은 종종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갈등을 회피하며 모든 책임을 떠안는 습관을 형성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는 안전을 확보하려는 본능적인 반응인 동시에 깊은 내적 상처와 자아 존중감의 손상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분노를 쏟아낼 때의 그녀의 목소리는 해방감을 드러내는 듯했다. 나는 가끔 그녀가 화를 내는 그 순간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에서 충족감을 얻는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 분노는 단순히 억압된 감정을 푸는 방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식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로 남았다. 남자친구는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침묵이 단순히 그녀를 향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녀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도, 그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분노를 표출할 때마다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 채워지지 않은 공허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공허는 분노라는 감정으로 덮여 있지만, 사실은 따뜻함과 안정감을 갈망하는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분노 뒤에 숨겨진 연약함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분노를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이상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인간의 감정이란 얼마나 다층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그녀가 언젠가 분노 너머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나 또한 그녀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