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불행해졌다

by 실타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내가 좋은 아내이자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골똘히 고민해 봤다. 결론은 아니었다. 불행해졌다.


# 6.

최근 주말마다 청첩장 모임, 결혼식, 집들이를 반복하고 있다.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이고,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이지만 내게 결혼이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무언가다. 실패한 결혼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불륜으로 도배된 엄마와 주변 사람들을 보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만 커졌다.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던 사랑주의자였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희망조차 없으면 내 삶은 너무 피폐하고 퍽퍽했으니까. 내가 직접 선택해서 꾸린 가정은 다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나는 엄마 아빠와 달리 사이좋은 부부이자 훌륭한 부모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좋은 배우자의 조건 중 늘 빠지지 않는 것은 '화목한 집안 배경'이다. 결혼을 이야기하는 유튜브 영상 댓글만 봐도 결혼 전에 그 댁 부모님을 먼저 봐라, 집안 분위기를 봐라, 그건 절대 무시 못한다는 얘기가 수두룩하다. 나는 애초에 잘못된 부모를 만나 조건 박탈이 된 셈이다. 또 언젠가 바람기는 유전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혹시 정말 내 유전자에 그런 게 있다면 내가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더러운 피가 들어있는 이 유전자를 대물림하는 게 맞을까. 나에서 끝내야 모두가 행복해질 지도 모른다.


# 6-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내 어느 부분까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난 이 부분을 항상 재고 따져봐야 했다. 내 모든 속사정을 알아도 떠나지 않을 사람인지 늘 의심하고, 시험하고, 불안해했다. 스스로와 상대방을 지치고 피폐하게 만드니 당연히 연애 또한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밝은 모습에 끌려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도 금방 도망쳤다. 내게 연애는 달콤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다. 사랑할수록 불안해하고, 미워하고, 보이지 않는 거리를 두는 사람이 나였다. 성인애착유형을 검사하면 불안형과 공포회피형이 섞여 나오는 최악의 파트너였다.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었기에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의구심부터 들었다. 나를 왜? 알고 나면 싫어질 텐데?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냐.


그래서인지 상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힘들었다. 남들이 보기엔 하자가 있거나 썩 좋은 조건이 아닌 남자들을 골라 사귄 이유라면 이유다. 내가 이렇게 엉망인데 멀쩡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순 없었다. 죄 같았다. 그래서 먼저 다 까발리고 싶었다. 나는 이만큼 아팠는데 너도 그만큼의 상처가 있네. 우리 불쌍한 서로를 꼭 껴안아주자. 내게 사랑은 그런 거였다. 대개의 애인들은 나의 불안정한 성향이나 우울감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한 번도 내 얘기를 제대로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가 나한테 이런 짓을 했고, 엄마는 지금 유부남을 만나고.. 이런 류의 얘기는 사이가 깊어졌다고 해서 마음대로 터놓을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건 숨기는 것 같아서, 솔직하진 못한 것 같았다. 마냥 사랑만 받고 자란 연기를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술을 잔뜩 마셔도 단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그 눈을 애써 무시했다. 이 모든 것을 꺼내놓으면 저 눈빛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질 것 같았다. 엄마는 이런 나를 안타까워하며 네가 왜 주눅이 드냐고 속상해했다. 아빠 손을 잡지 않고 들어가는 결혼식이나 시댁에서의 눈치 같은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서로 사랑만 하면 된다고. 정말 사랑이 이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은 언제든 변한다. 가족은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가장 큰 약점이다. 그게 늘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 6-2.

아이를 정말 좋아하지만 좋은 엄마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란 걸 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사랑도 받아본 놈이 줄 수 있다고, 난 한참 모자라고 부족한 부모가 될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나조차도 삶에 대한 의지가 희박하던 때가 있었는데 내 아이에게 건강한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포기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걱정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꿈꾸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사람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빛나는 그의 눈을 보면서, 아이들을 위해 보육원 봉사를 하고 달에 한 번 헌혈을 하러 가는 그 마음을 보면서, 그의 목표를 함께 이뤄주고 싶었다. 혼자만을 생각하던 삶이 둘을 위한 삶으로 바뀌며 인생 계획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무같이 단단하고 우직한 그의 모습에 위로와 안정감을 얻어서 좋았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드디어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비록 그가 아직 직업이 없는 수험생이었지만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은 천천히 모으면 되는 것이고 나도 아직 작사가로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 사실상 우린 같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 성향 차이는 점점 커져 다툼의 원인이 됐다. 특별한 것 같았던 인연도 누구나의 연애가 그렇듯 깨지고 붙기를 반복하며 해가 갈수록 해졌다. 그에게 조금씩 털어놓았던 나의 비밀은 의도치 않게 싸울 때마다 종종 비수가 되어 내 마음에 꽂혔다. 그래서 난 다시금 마음의 문을 닫았다. 영영 열리지 않을지도 모를 그 문을.


그와는 2년을 조금 넘게 만나다 올해 초에 헤어졌다. 사실 예정된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행복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니까. 그래도 이 자리를 빌려 덕분에 잠시나마 행복했고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다. 잊지 못할 거야. 이 브런치 연재도 네가 써보라고 용기를 줘서 시작할 수 있었어. 언젠가 네게 꼭 닿기를 바라. 그 땐 내 선택을 조금은 더 이해해주길.


나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과 이별을 반복할 것이다. 언젠가 또 한 번 결혼을 꿈꿀지도 모르지만 그게 현실이 될 가능성은 아주 낮을 것이란 걸 안다. 이번 주말에도 친구 결혼식에 참석해 나와는 달리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축복해 줄 것이다. 내겐 아마 없을 그 장면들을 고이 눈에 담아 사랑이라는 마법을 믿는 척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속여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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