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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May 17.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라고 불리는

1부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은 섹스만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한 침대에서 밤에 같이 잠이 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 

이불을 내젓는 습성, 

이가는 소리, 

단내 나는 입 등

그것을 이해하는 것 이외에도, 

그런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화장 안 한 맨 얼굴을 예쁘게 볼 수 있다는 뜻이며, 

로션 안 바른 얼굴을 멋있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팔베개에 묻혀 눈을 떴을 때 아침의 당신 모습은 볼만 하리라.

눈곱이 끼고, 머리는 떴으며, 침 흘린 자국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입에서는 단내가 날것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단내 나는 입에 키스를 하고, 

눈곱을 손으로 떼어주며
떠 있는 까치집의 머리를 손으로 빗겨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함께 그와 또는 그녀와 잔다.
처음에 당신은 그의 팔베개 안에,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겠지만.
한참 깊은 잠 중에는 당신들은 등을 돌리고 잘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깊은 잠 속에서 당신의 잠버릇이 여지없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갈기도 하고, 

눈을 뜨고 자기도 하고, 

배를 벅벅 긁거나,
잠꼬대를 한다거나, 

잠결에 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함께 잔다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단내 나는 입술로 키스를 할 수 있으며
옷을 충분히 입지 않았다면 바로 섹스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섹스만을 하기 위한 잠자리에서와는 다르게 

별도의 복잡한 절차와 교태와 암묵적인 합의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런...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은 매일 같이 잘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매일 같이 섹스를 하는 사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이 아닌 곳에서, 

애인과 섹스를 할 때에는
일단 그와, 그녀와 어떤 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아니면 충분히 매력적이다라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튼 잘 만난 사람이며 사이라는 것을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다.

몇 시에 호텔에 또는 여관에 들어가서 몇 시에 나선다는
그런 합의가 있으며
그곳에 가기 전에 상대방의 귀를 만진다든지,
엉덩이를 만진다든지, 하고 싶어라고 말을 한다든지 하는
서로의 확실히 약속된 언어적, 비언어적 합의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남자는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열 것이고.
여자는 텔레비전을 켜며 콘돔을 준비하라고 말을 한다.
둘은, 습관에 따라 먼저 목욕탕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그냥, 침대에서 일부터 벌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가면
잠시 누워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도 하며
여자는 눈썹이 지워지지 않았나? 화장을 고칠 것이며
남자는 자신이 여자를 만족시켰나? 다시 되씹어 볼 것이다.

그런 후 다시 한번의 폭풍이 있을 것이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정력이 형편없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후
다시 목욕탕에 들어가 씻고
그곳에 발을 디딜 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여자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으며
남자는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을 것이다.

그러면... 섹스 뒤의 느낌은 어떨까.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런 최면에 걸렸다면 좋을 것이고,
여자가 집에 늦었다면 불안할 것이며,
새벽께 라면 남자는 더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가임 기간이라면 둘 중 하나는 불안할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기쁠지도 모른다.
불행하다면 둘 다 불안할 것이다.


그들은
항상 꾸민 모습으로 만나며,
눈곱 낀 얼굴을 볼 수 없으며 단내 나는 입술에 키스를 할 수 없다.

남자는 여자의 화장 안 한 얼굴이
얼마나 큰 상상력을 요구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며,
여자는 남자가 얼마나 씻기 싫어하고 게으르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잘 차려진 모습으로 만나며
섹스는 그들만의 합의된 축제이다.

그러므로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은
한 침대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단 것과 다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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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주 어렸던 시절, 섹스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사랑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도 어렴풋이 이런 생각은 항상 가슴속에 있었다.
포르노 배우들이나 창녀들도 인간이기에 사랑을 할 것이고, 사랑에 목말라할 것이다.
그들의 직업이 섹스라고 그들이 인간성을 상실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 역시 사랑하는 이와 데이트를 즐기고 사랑을 나누고 싶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안고 있을 때의 만족감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감동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느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2004년 8월 어느 날, 내가 달았던 댓글)





인터넷에는 작자 미상의 글이 많이 떠돌아다닌다.

20여 년 전에 이런 글이 인터넷에 흘러다닌 적이 있다.

처음 이 글을 봤던 2004년 즈음에는 잘 맞춘 운율과 공감되는 내용 때문에 

무척 감동하면서 읽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 글의 마지막 출처 부분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바로 이 부분이다. 


"번역서에 과연 이런 위의 문장이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에 이런 시적 글이 어떻게 삽입되어 있을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슬슬 호기심에 발동이 걸렸다.  

알다시피 돈 못 버는 사람의 특징은 쓸데없는데 관심이 많은 것이다.


나는 이 글을 보관한 지 10년쯤 지났을 무렵 갑자기 글의 출처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몇 번의 클릭질로......



(다음 편에 계속)


**피곤해서 오늘은 더 못 쓰겠음.. ㅠ.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일도 일은 해야 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2부, 클릭)

https://brunch.co.kr/@hyorogum/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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