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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산미겔(San Miguel) 맥주 이야기...

by 벼랑끝

[세부(Cebu, Philippines) 남부 투어]

#08, 산미겔(San Miguel) 맥주 이야기...


김 선생님과 함께 집 근처 바닷가 구경을 했다.

바이스 시티는 한적한 시골 어촌 마을이었다.

동네 구경이 끝날 즈음 꼭 갈 곳이 있다면서 묘한 곳으로 날 데리고 갔다.

맥주 맛이 아주 기가 막힌 집을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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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는 “산미겔(San Miguel)”이라 불리는 유명한 맥주가 있다.

(영어 발음대로 읽으면 ‘산 미구엘’이지만 현지에서는 ‘산미겔’이라 발음한다)

“산미겔”에 대해서는 전설 같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산미겔 맥주는 특이한 제조 공법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렇게 만들면 싸구려라고 해서 아무도 안 마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리핀 “산미겔 맥주”는 오랫동안 맛있는 맥주로 정평이 나있고 덕분에

수출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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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들 “산미겔 맥주”가 입에 딱 붙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오리지널인 “산 미겔 필센(San Miguel Pilsen)”이 제일 사랑받지만 도수나 향에 따라

종류는 다양한 편이다.


가이드들은 “산 미겔 필센(San Miguel Pilsen)”이 세계 맥주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몇 번이나

했다며 매우 유명한 술로 소개하는데, 세계 맥주 콘테스트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만약 있어서 순위를 매긴다고 해도 그게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나도,

"세계적인 유람선인 퀸 엘리자베스호가 세계일주를 할 때 맥주를 딱 3 종류를

싣고 출발하는데 그중 하나가 "산미겔 필센"이며, 이건 세계 맥주 콘테스트에서

무려 세 번이나 우승을.... 어쩌고 저쩌고..." 하는 멘트를 수도 없이 많이 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가이드 교육 족보에 나오는 멘트들인데 실제로

확인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싸구려틱한 맥주가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알 수가

없지만 신기한 것은 필리핀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산미겔(필센)”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bbcd8e2c6ea0e82b9b71168a320d80bb.jpg '바이스 시티'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판다고 김 선생님이 주장했던 식당


김 선생님과 함께 간 곳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식당이었다.

바이스 시티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판다는 이곳을 김 선생님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그래서 나는 뭔가 특별한 맥주 칵테일이라도 파는가 생각했는데,

웬걸!! 술을 주문했더니 그냥 슈퍼마켓에서 파는 평범한 “산미겔 필센”

병맥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게 뭐가 다른가요?” 하고 물었더니, 일단 마셔보라고 한다.

그때까지도 나는 김 선생님이 뭔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얼음을 주문에서 맥주에 넣으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참고로 현지인들은 “산미겔 맥주”에 얼음을 넣어 먹는다. 한국에서는 맥주에

얼음 넣는 일이 흔치 않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버릇처럼 맥주에 얼음을 넣어 마신다.

“산미겔 필센”에 얼음을 넣으면 청량감이 더해지면서 맥주 맛이 신기할 정도로 확! 바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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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은 이 집 맥주는 특별해서 얼음을 타면 안 된다고 했다.

슈퍼에서 파는 맥주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그가 그렇게 주장하니 굳이 아니라고 하기도 그랬다.


내가 맥주 한 병을 마실 동안 김 선생님은 다섯 병이나 마셨다.

새로운 맥주를 딸 때마다 “이 집 맥주는 정말 맛있어...”를 잊지 않고 외치면서...


주택을 개조한 어설픈 필리핀 현지 식당에서 우리는 꽤 긴 시간 동안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했다.

태어나서 두 번째 만나는 사람과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7a02743c7ca0cd0d326d93b8fcb84c5d.jpg '바이스 시티'에서 제일 맛있는 병맥주를 파는 식당 뒤뜰(사실은 왼쪽 담쟁이 건물이 화장실 임..^^;;)


이런저런 담소와 함께 지는 해를 보며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가끔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야한 농담 따위를 나누며 수다스러운 남자의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술을 마셨지만, 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왜 거기 왔는지,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도피자처럼 보이는 몰골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뭔가 자기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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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김 선생님이 끓인 참치 김치찌개로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고 김 선생님은 침대 옆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김 선생님이 누운 채 말했다.

“자네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아 세상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알잖아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지나고 보니 생각대로 되는 게 꼭 좋은 것도 아니더라고 생각대로 안 됐다고 나쁠 것도 없고 말이야."


"지금 돌아보면 별거 아닌 일이 더 많았던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자네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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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면서 하는 이야기여서인지 생각을 하면서 하는 이야기여서인지,

아니면 내게 실수하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김 선생님은 말이 뚝뚝 끊어졌다.

잠꼬대처럼 들리기도 했다.

마지막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가 잠든 줄 알았다.

나도 비몽사몽 잠이 들 무렵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내일 돌고래나 보러 가, 아침에 선착장에 가면 ‘화이트 샌드’ 가는 배가 있을 거야

그거 타면 돼, 거기 되게 좋아”


“네? 거기가 어딘데요?”라고 물으려 했는데, 그는 이미 코를 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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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막탄’을 출발해서 ‘오슬롭’을 거쳐 커다란 배에 차를 싣고

‘네그로스 섬의 바이스 시티’까지 왔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을 통과해서 필리핀에서 4번째로 큰 섬의 구석 '바이스 시티'라

불리는 도시에 한 명 밖에 없는 한국인의 집 침대에 눕는데 꼬박 18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은

운전을 했던 시간이고 나머지는 배나 사람을 기다린 시간이었다.


이제 여행의 첫 밤이 기운다.

눕고 보니 참으로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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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여행을 떠날 것을 어제는 알지 못했다.

내가 오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산미겔 맥주를 마시고, 참치 김치찌개를 먹고,

남의 침대를 뺏아 잠들 것을 오늘 아침 세부를 떠날 때까지 상상도 못 했다.


잠결에 돌고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마도 자기 침대를 내어주고 바닥에 누운 남자의 코 고는 소리였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돌고래 소리였을 수도 있다.


"내일 진짜 돌고래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어 정말 다행이다"



(8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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