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Go or Return...
[세부(Cebu, Philippines) 남부 투어]
#11, Go or Turn...
마음을 추스르고 차를 한 바퀴 돌아봤다.
차는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기분 탓인지 오른쪽 뒷바퀴가 좀 주저앉은 것처럼 보였다.
불안하다. 여기서 펑크라도 난다면 정말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혹시라도 옳은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나는 사람이 있나 잠깐 기다려 보기로 했다.
15분 정도를 보내며 사람을 기다려 보아도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Go”를 할 것인지 “Return” 할 것인지를 빨리 판단해야 했다.
이러다 산 위에서 해라도 지면 정말 큰일이다.
나는 먼저 두 가지 상황의 장단점을 따져봤다.
1) “Go”인 경우
마지막 구글 지도가 연결됐던 곳에서는, 이 길로 계속 산등성이를 따라가면
“풀랑바토 폭포”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을 수는 있지만
풀랑바토 폭포는 유명한 관광지이니 길이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내 느낌으로는 이 산 꼭대기 길을 더 직진한다고 해도 큰 길이 나올 거 같지 않다.
왠지 길이 더 높은 옆의 산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도로의 상태가 너무 안 좋다.
내 차의 엔진 마력 수나 타이어 형태로 볼 때 이런 비포장도로를 계속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2) “Return”인 경우
지금 올라온 험하고 미끄러운 산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
경사가 몇 도인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차로 올라본 도로 중 최고의 경사였다.
비포장인 데다 밤새 온 비로 매우 미끄럽다. 차가 뒤틀리면서 도로를 밖으로 전복이라도 되면
전혀 대책이 없다. 전화도 안 되고 인근에 사람도 없으니 견인이고 뭐고 불가능하다.
아니 된다고 해도 견인차 역시 올라올 방법도 없다. 만약 이런 산속에서 고립이라도 되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분 정도만 내려가면 큰길이 있는 민가를 만날 수 있다.
지나온 길이니 분명 민가가 있는 건 확실하다.
도로 여행은 종이 지도가 필수인데 디지털 세상에 빠져 살다 보니 기본적인
도로 여행의 지침을 잊었다.
“필리핀에서 구글 지도를 믿고 움직이다니….” ,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입에서 같은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한동안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결심을 했다.
나의 본능은 온 길을 되돌아가라고 하고 있었다.
차에 문제가 생겨도 일단 내려가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다시 운전석에 앉아 차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을 끊었다.
이미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 계속 미련을 가져봐야 불안함만 가중된다.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해보지 않았던가,
위기를 뚫는 길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가기로 했으면 가는 거다.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큰길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 옳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벨트를 단단히 조이고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왠지 유리창이 깨지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를 산 아래로 향하자 첫걸음부터 헛바퀴가 돌며 차체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젠장, 내가 왜 종이 지도를 안 샀던가?”
몇 푼 아까워 사지 않았던 종이지도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일단 헛바퀴가 돌면 무리하게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차를 미끄러지게 놔두는 방식으로 운전을 했다.
브레이크와 핸드 브레이크 두 개를 모두 신경을 쓰면서 속도가 너무 느리지 않게 엔진에 기어가
걸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굴리는 형태로 차를 몰았다.
(이차는 수동기어 차량이다. 필리핀에서는 아직 스틱 차량이 많다.)
미끄러지면 미끄러지는 쪽으로 차를 흘리며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안간힘을 쓰면서
차 머리의 방향을 잡았다. 중요한 건 도로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급브레이크는 절대 밟으면
안 된다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주입했다.
초긴장 상태로 몇 번을 미끄러지며 얼마쯤 내려가자 열린 창문으로 나뭇가지들이 들이쳤다.
그래도 창문을 닫을 수는 없었다. 손이 쉴 틈이 없었고 또 창을 닫는 건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한 10분쯤 내려가자 드디어 비포장의 끝이 보였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들은 보였다. 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도로가 훨씬 나아졌다.
10분쯤 더 내려가니 동네 아이들이 보이고 큰길도 보였다.
그때서야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몸에서 힘이 주욱 빠졌다.
일단 구멍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음료수를 사서 한 모금 마셨다.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별 거 아니네!! ”
동네 사람들에게 “풀랑바토 폭포” 가는 길을 물었더니 내가 내려온 반대 방향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야! 너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만 흔들고 그 동네를 빠져나왔다.
어쨌든, 다른 길로 가고 있었던 건 확실했던 것 같았다.
도대체 구글맵은 왜 날 그쪽으로 인도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길이 있기는 있었다.
산을 2개쯤 지나야 하고 오토바이도 겨우 갈 수 있는 험한 도로라고 동네 사람들이 알려줬다.
동네 사람들이 가르쳐준 길로 가다 보니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하는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의 옆에서 유황 연기가 피어오르고 붉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었다.
풀랑바토 폭포는 "유황수 폭포"였다.
유황 온천은 여러 곳을 가 봐서 이런 냄새는 익숙하지만 "유황수 폭포"는 처음이었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자 드디어 “풀랑바토 폭포” 유원지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큰길을 놔두고 나는 왜 산속에서 미친 짓을 했을까?
'풀랑바토 폭포 유원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차를 돌아보니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뒷바퀴도 큰 문제없어 보였다.
이 차를 끌고 다닌 지 5년이 넘었다.
가이드 일을 할 때는 사람이 많이 탈 수 있어 도움을 꽤 받았었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일도 함께 해주 아주 고마운 녀석이다.
꽤 오래 동고동락을 했지만 오늘처럼 이 녀석이 든든하고 고마운 적은 없었다.
주차장에서 시동을 끄고 차를 두드리며 한 마디 했다.
“고생했다. 너도 좀 쉬어라….”
돌아서서 폭포로 올라가는데 뒤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듯했다.
"너도 수고했어!"
“자식!!! 제법 하는데?”
(11부 끝)
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