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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대표 Sep 26. 2023

잘 나가던 피아노 강사 전업주부가 되다

온라인 세상에 첫 발을 내딛다!

단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나는 재학 중에 개인 레슨을 시작했고 졸업 후 본격적으로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했다. 많은 아이들을 상대로 짧게 진행하는 학원식 레슨은 나에게 맞지 않아서 개인 레슨만 했다. 비전공자인데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으로 계시는 분들에게 아이들 가르치는 교습법을 레슨 하기도 했다. 몇 년 레슨을 하다 보니 소문이 나서 수입도 나름 괜찮았다. 나는 아이들을 레슨 하면서 가르치는 직업이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한 후 타임을 좀 줄이긴 했지만 계속 일을 했고 첫째,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동안에도 친정 부모님께 아이들을 맡기고 레슨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셋째 아이를 출산하면서 엄마께서는 “더는 못 봐주겠다!”라고 선포하셨고 그 계기로 나는 잘 나가는 피아노 강사 워킹맘에서 졸지에 초보 전업주부가 되었다. 물론 더는 못 봐주겠다고 말씀하셨던 친정엄마는 지금도 아이들 양육하는데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시고 계신다. 연세도 있으신 부모님이 세명이나 되는 손녀들을 갓난아기 때부터 키워주시는 건 분명 힘든 일이다. 워낙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건강관리를 잘하시는 분들이라서 아직까지도 잘 도와주시지만 말이다.


당장 아이가 태어나면 레슨을 정리해야 하는데 걱정이 산더미였다. 결혼 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맞벌이로 우리 가정의 경제적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당장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지내야 한다니 앞이 깜깜했다. 게다가 아이도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으니 양육비는 더 늘어날 테고 그동안은 내가 경제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용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았었는데 그 부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을게 뻔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외벌이로 애 셋을 키운다는 건 힘들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품 안에 막뚱이를 보고 있으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는 내 어깨를 더 무겁게 눌렀다. '나가서 일할래? 집에서 애 볼래?' 그러면 '나가서 일한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를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은 레슨이 없는 날은 살림과 육아를 혼자 감당하기도 했지만 레슨이 있는 날은 엄마가 아이들을 돌봐 주셨다. 그때도 느꼈지만 독박 육아를 하느니 일을 하는 게 몸이 더 편했다. 아마 육아를 한 번쯤 해보신 분들은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절대로 내가 엄마로서 모성애가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면 안 된다.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케어했고 살림도 나름 똑소리 나게 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부분도 문제였지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내 인생인데 내가 없는 생활이 끊임없이 반복되니 지쳐서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현실적인 문제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에게 찾아왔다. 바닥이 보이도록 텅텅 비어 가는 통장 잔고를 보고 있으면 내 자존감도 함께 바닥을 쳤다. 그때의 내가 보는 난 더 이상 잘 나가던 프리랜서 피아노 강사가 아니었고 그저 무능력한 아줌마였다. 그 사실이 너무 싫고 슬펐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난 아이들을 재우고 밤이 되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집에서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네이버가 완전 핫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다음에서 검색에 검색을 이어갔고 재테크에 관한 네이버 블로그 글을 발견했다. 그 글은 재테크 네이버 카페를 홍보하는 글이었고 다음에서만 놀던 나는 그날로 네이버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재테크 카페에 가입해고 전체 글을 조회해서 첫날 첫 글부터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시작하면 가장 기초, 바닥부터 습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성향이 있기에 파고들었다. 재테크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첫 글부터 읽으면서 공부하고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 카페의 소통왕이 되었고. 한 달가량 열심히 들이 파고 소통한 결과 난 부 카페장이 되어있었다. 재테크 카페였기 때문에 많은 정보들이 있었고 나름 리더의 위치에 올랐기 때문에 온라인의 부업들을 통해 조금씩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다양한 부업 아이템들과 수익화 방법들을 내가 먼저 공부하고 섭렵한 후 부카페장으로서 다른 스텝들과 회원들에게 교육했다. 그 당시 줌은 없었고 스카이프로 화상 회의나 교육을 했다. 1:1로 케어가 필요한 회원은 네이트온 원격으로 보면서 교육했다.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고 여겼던 나의 강점은 여기서도 빛을 발했고 교육하고 코칭해서 이끌어가는 게 재미있었다.


컴퓨터 사용이 많아지다 보니 움직임이 많은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데스크탑으로 일 하는 건 힘이 들었다. 큰맘 먹고 용산에 가서 아수스 노트북을 사 왔고 돈 많이 벌어준 그 노트북은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10년을 넘게 썼는데 기특하게 잘 버텨주고 있다. 재테크 카페에서 한참 상담과 교육을 많이 할 때는 낮에도 막내를 업고 싱크대에 노트북을 펴두고 일을 했다. 수시로 상담, 교육 요청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이가 잠들기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 일들을 감당했는지 나 스스로도 아이러니하다.


재테크 카페에서 국내외 네트워크 사업들도 진행했었는데 난 리더였기 때문에 항상 상위에 위치할 수 있었다. 카페 회원들이 쭉쭉 하위 라인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을 교육하고 끌어주면서 카페 차원에서 나름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의 수익구조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쏠쏠하게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한동안 열심히 진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위 회원들만 돈을 벌고 하위 회원들은 돈을 벌지 못하는 구조에 양식의 가책을 느껴졌다. 더는 진행하면 안 되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한창 잘 나갈 때였지만 카페를 탈퇴하고 나왔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과정을 통해 난 카페 마케팅과 지식인 마케팅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수많은 네트워크 시스템도 빠삭하게 장, 단점을 분석해 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들도 유행이 있다. 10년 전 그때는 지식인과 카페를 통한 마케팅이 활발했었고 그 유행이 블로그로 이동하던 때였다. 그 흐름을 잘 타서 나는 블로그 세계로 옮겨왔다. 하나를 해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난 블로그도 1서부터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우며 시작했다. 어디서 이런 근성이 나오는 건지 지치지도 않고 열정정으로 공부하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포스팅을 할 때도 모르는 게 있으면 어떻게라도 찾아서 정보성 글을 만들어 올렸고 키워드를 활용한 유입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웃과의 소통도 카페에 처음 정착할 때처럼 열심히, 진정성 있게 하다 보니 점점 찐 이웃들이 많이 생겼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노트북 앞에서 새벽까지 수많은 시간 모든 열정을 불태웠다. 셋째 딸 덕분에 얼결에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것과 부업으로 수입을 만들어 내는 것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돈 버는 방법을 빠르게 섭렵했던 것 같기도 하다. 10년 이상 온라인으로 먹고살다 보니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본질적인 부분과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이 공존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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