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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대표 Nov 27. 2023

번아웃.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다

우밍아웃

번아웃?

셋째 아이를 낳고 2년 동안 노트북 붙들고 미친 듯 일만 했다. 당시 초등 저학년이던 큰딸과 유치원생인 둘째, 돌 겨우 지난 막내를 키우며 일을 병행했다. 돈도 돈이지만 새롭게 알아가는 온라인 세상과 다양한 일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푹 빠져 지냈었다. 출퇴근하는 일이었다면 업무와 사생활의 분리가 어느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일상 중 자투리 시간까지도 업무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업고 싱크대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일하는 것도 부지기수였고 일이 중간에 끊어지지 않으면 아이들 식사가 소홀해질 때도 있었다. 요구사항 많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텔레비전을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나의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이들 셋을 키우며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저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아기띠로 막내 녀석을 안고 거실창 너머를 바라보는데 창밖 땅이 나를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내다보다 창문을 열었다. 저 아래 바닥에서 나를 부르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창틀을 밟고 올라섰다. 그대로 뛰어내려 고단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천으로서 절대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내 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이가 안겨 있었는데 말이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아이 때문도 신앙 때문도 아니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우리 집에서는 뛰어내려도 한방에 죽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최악이다. 그 무엇도 다 상관없었다. 사는 게 너무 고단하여 그저 다 내려놓고 싶었을 뿐. 그랬다. 반갑지 않은 손님 마음의 병이 찾아온 것이다.


우밍아웃. 가면성 우울증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죽는 방법을 고민했다. 혼자서 운전대를 잡으면 중앙분리대를 들이박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전속력으로 달려와 들이박으면 한 번에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한 번에 죽지 않으면 불구로 살아가게 될 텐데 겁쟁이였던 난 그건 또 싫었다. 외출의 기회가 주어지면 옆동네, 그 옆동네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 모았다. 한 번에 많이 사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두 개씩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쟁였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나는 이렇게 병들어가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시간 동안에는 너무나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 와중에 교회 반주자의 자리도 빠지지 않고 지켰다. 아니 지켜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전혀 괜찮지 않은데 전혀 괜찮은 척하느라 마음은 갈기갈기 헤집어졌다. 다 내려놓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얼마 전 이때 나의 상태는 전형적인 '가면성 우울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왜 병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혼자 아파했던 모습이 떠올라 너무 가여웠다.

'하나님 저 좀 데려가주시면 안 돼요? 너무너무 힘이 들어요.' 기도할 때마다 나 좀 데려가주십사 간구했지만 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사명자로서 내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아직 남아서겠지. 머리로는 알겠지만 이미 병들어버린 마음은 수도 없이 존재의 이유를 부인했다.


일단 너부터 살자.

하루는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에게 커피 한잔 마시게 넘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지? 싶은 마음에 막내를 엄마께 잠시 부탁하고 언니네 집으로 갔다. 들어서면서 느껴지는 언니네 집의 포근함과 갓 내린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긴장감을 내려놓게 했다. 언니는 따뜻한 커피와 다과를 내주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막내 빨리 어린이집 보내.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너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니? 언니가 볼 때 너 너무 위태위태해 보여. 당장이라도 뭔 일 낼 것 같단 말이야. 아이가 아직 어려서 미안한 마음 드는 건 이해해. 하지만 잠시 분리시켜 놓고 너 건강부터 챙겼으면 좋겠다. 그게 너와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


충격이었다. 언니 이야기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정말 잘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나를 언니는 위로해 주었다. 어깨를 토닥여주며 손을 잡아주었고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을 수습할 수 있도록 휴지를 건네주었다. 부끄러웠지만 나의 아픔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내편이 생긴냥 묘하게 든든했다.

언니의 조언대로 셋째가 3살이 되던 해 언니들보다는 1,2년 빠르게 어린이집을 보냈다. 꽁꽁 감춰두었던 마음의 병은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했던 거라 돌봐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갔다. 형식적인 상담을 하고 기계적으로 내려주는 처방을 받아왔다. 어쩌면 의사가 고칠 수 없는 병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좌절스러웠다.


온라인 세상에서 다시 오프라인으로

셋째 녀석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한 달간은 적응하는 기간을 보냈다. 한 달간은 아이가 한 시간만 있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그다음은 2시간, 그다음은 점심까지 먹고 오고 마지막으로는 낮잠까지 자고 온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져서 한 번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에 적응기도 오래 걸렸다. 아이를 보내고 청소 잠깐 하고 돌아서면 데리러 가야 했기에 처음 한 달은 정신없이 훌쩍 지나갔다. 3월 말쯤 되니 아이는 이제 완전히 적응해서 늦게 하원을 해도 웃으며 잘 떨어졌다. 비로소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고 난 조금씩 운동을 하며 원래의 내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온라인으로 하던 일들도 피아노 반주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예전만큼 많이 힘들진 않았다. 마음이 좀 편안해진 걸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베프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는 삼성화재 육성팀 매니저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네 회사 교육에 한 번만 와 달라는 거였다. 막내 어린이집 적응하고 얼마 안 지난 4월의 일이었기에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쉬면서 엉클어진 내 일상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는데 하도 여러 차례 부탁하기에 교육만 한번 가기로 했다. 처음엔 교육 한 번을 이야기했는데 막상 디데이가 다가오니 한 달 교육과 시험까지 보면 급여도 나오고 시책이 걸려있어서 보상도 나온다고 했다. 교육받아보고 할 만하겠으면 본격적으로 일을 해도 되고 교육에 재능이 있으니 나중엔 사내 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제안을 받을 때까지도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친구의 부탁이니 교육이나 한번 받아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보험회사의 신규사원 모집 방식인 리크루팅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교육이나 한번 받아보겠다고 찾아간 회사였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그동안 대화상대도 없는 온라인에서 외롭고도 치열한 시간들을 보내왔던지라 교육도 재미있었고 동기들과의 생활도 즐거웠다. 한 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치른 설계사 시험에서는 98점 고득점을 받으며 합격했다. 친구는 시험까지만 보라고 했지만 나름 재미도 있고 함께 부대끼며 일을 해보고 싶기도 해서 출근을 결정했다. 초반 3개월 정도는 육성팀에서 신입 교육과 보험 영업 교육을 받았다. 가장 먼저 했던 작업은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열고 가망고객을 뽑아내는 일이었다. 보험회사에 갓 들어온 신입들이 영업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본인의 기존 계약들을 재점검해서 부족한 보험은 가입하여 추가한다. 그다음은 가족, 그다음은 지인 순으로 영역을 확장한다. 보험회사에서 리쿠르팅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한 사람의 신입이 들어왔을 때 그로 인해 가망고객이 확보되기 때문이란 건 내가 발 담고 있을 땐 미처 몰랐다. 초반에 다 갈아엎거나 추가하고 장기적으로 근무하면 더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생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영업이란 게 그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지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 못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장벽이 높은 직무였다.


현장으로 뛰어들어 개척영업을 하다.

아무리 강요해도 지인 영업은 도저히 못하겠다. 마침 그 당시 다중이용업소 화재보험 의무가입이 시행되던 초창기였다. 전국의 소방서에서는 다중이용업소 사장님들을 대상으로 주기적인 교육을 했고 사장님들은 화재보험 가입이 의무가 되던 시점이었기에 모두 화재보험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난 내가 물리적으로 도전 가능한 지역의 소방서 리스트를 뽑고 각각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교육일정을 조사했다. 달력에 각기 다른 소방서의 교육일정을 표시하고 다중이용업소 사장님들 대상으로 의무가입 화재보험 리플릿과 간단한 선물을 준비했다. 소방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교육에 참석하는 사장님들께 다중이용업소 화재보험 안내지와 명함을 전달했다. 토요일에도 출근을 해서 다중이용업소 리스트를 뽑고 화재보험 리플릿을 DM으로 발송했다. 뭔가 한 가지 일에 꽂히면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타고난 열심은 필요한 순간엔 항상 내 편이 되어주었다. 발로 뛰어서 열심히 한 결과 난 신입 중에서도 화재보험 전문 설계사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 건지.. 뭔가에 홀린 듯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 열심히 살았다.

보험회사는 급여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매달 실적을 내야 했고 마감날이 다가오면 늘 시달렸다. 인맥이 넓지 않은 신입들은 대부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과 가족, 지인들의 보험 계약으로 연명하다가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중 영업력이 뛰어난 몇몇만 생존하여 롱런할 수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내가 그 세계를 경험하고 보니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생태계였다. 특정 직업을 비하하거나 끌어내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내가 직접 겪고 느낀 부분이다. 화재보험으로 유의미한 실적을 많이 내긴 했지만 재물보험은 수수료율도 낮고 실적을 인정받기엔 부족했다. 수수료율이 높고 한건을 하더라도 실적을 인정받는 인보험을 많이 해야 했다. 하지만 태어나길 뼛속까지 I인지라 사람들을 만나서 입 떼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화재보험으로 실적 올리고 그 사장님들 대상으로 인보험까지 연결시켜서 여러 건 했지만 이 일을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우울하고 괴롭고 자신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노력을 훅 쏟아붓고 나서 난 또다시 굴을 파고 들어갔다. 몇 달을 지속해 오던 일인데 당장 내일부터 단 하루도 더 못하겠는 막막한 기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었고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힌 난 몇 달간 소홀했던 블로그에 다시 매달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환경과 상황들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심지어 안정감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지쳐서 손을 놔버리고 쳐다보기도 싫었던 블로그였는데 이젠 그거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인생 참 우습고 헛헛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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