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자존감

그리고 나의 자존감

by 송새벽
"오늘 가족회의 몇 시에 할 거야?"


우리 집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발표하는 형식의 가족회의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횟수로 4년째다.

이 소재로 나의 첫 그림책 《욱이네 가족회의》가 출간되었다.

매주 일요일 늦은 저녁에 하는데, 이번 차례가 바로 욱이다. 어떤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이번 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조금 불안하다.





장을 보러 가기 전, 점심을 밖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보쌈에 칼국수, 닭갈비, 감자탕... 뭐 먹을래?"

남편의 제안에

"욱아! 보쌈에 칼국수, 닭갈비, 감자탕 중에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아이에게 선택권을 넘겨준다.

늘 이런 식으로 아이의 의견을 최선으로 반영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매번 아이의 의견만 듣는 건 아니기도 하다.


메뉴는 아이의 선택으로 '감자탕 집'으로 결정이 났다.

동네에 있는 '감자탕&뼈찜' 집에서 아이가 '뼈찜'을 골라 남편과 둘이 먹으라고 소자 하나, 그리고 나는 '얼큰이 칼국수'를 시켰다. 맵찔이까지는 아니지만, 보통맛이어도 아이에게 충분히 맵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신메뉴인 '로제 뼈찜'을 제안해 보기도 했다.

음식이 나오고, 역시나 아이는 콧잔등에 땀을 송글송글 맺어가며 물을 연신 들이켠다.

"거봐, 맵다고 했잖아. 엄마 꺼 얼큰이 칼국수가 덜 매울 정도라니까."

내가 먹는 다른 메뉴의 맛을 꼭 '한입만~'이라며 맛을 보기를 원하던 아이가 웬일인지 '먹어볼래?'라는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어서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말을 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굳이 '거봐, 내 말이 맞지?'를 해야 했을까?

돌이켜보니, 내가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거봐, 엄마 말이 맞지?"
의 문장 속에 '너의 선택은 틀렸어.', '엄마 말이 맞아.', '그러니까 엄마 말을 들어.'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난 왜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나의 말이 맞음을 수긍하길 바라는 것일까?



지독한 가난의 탓도 있었겠지만, '아이는 저절로 자라.'라는 사고방식의 부모님은 딸들에게 장난감 한 번을 사준 적이 없다.

그에 비해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사는 이모네 집에 가면 사촌 언니의 인형이 넘쳐 났다. 비싼 바비인형부터 미미, 쥬쥬 없는 게 없는 이모네 집에서 사촌 언니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날은 이모부가 용돈을 30,000원을 주신 날이었다. 그 당시에도 비싼 바비인형은 꿈도 못 꿀 돈이어서 나는 미미인형 하나와 내가 좋아하던 "더 블루"의 앨범 '카세트테이프'를 사들고 무척이나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복도식 아파트 12평의 작은 집 현관 밖에서 내가 받은 용돈으로 처음 산 인형과 카세트테이프는 둘째 언니의 손에 버려졌다.

내가 생각 없이 돈을 썼고, 그 버릇을 미리 고쳐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 집은 13층 정도였던 것 같다. 한참을 울다가 1층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산산조각 난 잔해들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산산조각 났던 어린 시절 기억의 한 단편이다.



장을 보다가 장님감 코너를 지나며, 처음 보는 로봇 시리즈를 발견했다.

아이의 처음 변신로봇은 '또봇'이었고, 막내 언니의 아이가 가지고 놀던 것을 물려준 장난감이다.

초창기 또봇은 변신이 무척 까다로웠다. 자동차로 로봇으로, 또 자동차로 로봇으로 무한반복하던 시절에 '헬로 카봇'을 거쳐 '터닝메카드'가 나왔을 때, 남편과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변신이 쉬운 장난감이 나오다니! 아이가 어느 정도 더 크기도 했지만, 혼자서 충분히 변신을 시키며 놀 수 있게 된 것이 드디어 변신지옥에서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장난감들을 나는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했다.

각종 '변신 로봇'들은 말할 것도 없고, '레고' 시리즈를 사주며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해서 복잡한 시리즈도 뚝딱뚝딱 맞추며 책장 위에 아이와 함께 만들어간 완성작을 전시하며 놀았었다.


부모들은 육아를 하며 어린 시절의 결핍들을 치유한다고 한다.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더 열심히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모든 부모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내가 받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고 싶어서, 혹은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아이에게는 채워 주고 싶어서 열심히 육아한다.


나는 나의 결핍을 아이에게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충실하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치유된 결핍들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완벽히 치유되기는 사실상 어렵다.

평탄할 때는 괜찮아졌다가도,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생기면 감정이 요동 친다. 그건 마치 성난 파도와도 같다.


장난감 코너를 지나며 아이에게 '네가 그랬었어~'라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불쑥 나의 어린 시절의 단편이 떠오를 때, 마음이 편안하면 '피식- 그래 그때 그런 일도 있었지, 언니도 어렸으니까.' 할 일이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는 마음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지.'라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상실감과 우울감, 그리고 묘한 분노가 일렁인다.




"자존감은 낮은데, 자존심은 세서 난 그걸로 버텼어!"

나는 이 말을 30대 초반까지 하고 살았다.

"자존감도 떨어지고 자신감도 없는 거 같아."

라던 내 아이의 말의 공통점은, 자기 확신이 부족과 자기 가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 외부 상황에 따라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면의 안정감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그렇지만 자존심은 세다'라는 말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에서 기인한다.

그에 비해 나의 아이의 '자신감도 없다'라는 말은 '극도로 위축된 아이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아이 스스로 자기 상태에 대해 말을 했다는 것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까?

그렇다면, 위축된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나야말로 여태껏 아이의 자존감을 깎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거봐, 엄마 말이 맞지?"
말고
"이야~ 매워도 잘 먹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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