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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Feb 07. 2024

고전이라는 책

불경한 세상을 탐하다

고전은 무엇일까?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고전은 읽는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책이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평생 동안 어렸을 때 형성된 가치관과 세계관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허다한 것을 보며, 지극히 논리적으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변화시키려는 작은 노력조차 하지 않는 많은 이들을 보며,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하며 드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많은 이들을 보아오며 성인이 되었다.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사람을 설득시키는 세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이성적 설득 전략(logos)과 감성적 설득전략(pathos), 인성적 설득전략(ethos)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같이 어려운 조건들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고대인들마저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 힘든 일을 기꺼이 해내는 책들이 바로 고전이다. 그렇다면 고전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명확하고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감정적 전략으로? '내가 낸데.' 하는 권위 있는 작가의 이름으로?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전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고통이다.
충격이고, 전복이다.
실로 세상이라는 알 하나를 파괴시키는
강력한 충동이다.   

그러므로 고전은 불경하다. 아니 불경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를 깨부수고 전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 충격을 위해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말단의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고(카뮈의 '이방인'),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며 신이 버린 세상에서 마침내 찾아온 구원자에게마저 문을 그러 잠그기도 하고(도스토예프스키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 살인을 저지르고(그리스 로마 신화 등), 동성 간의 결혼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고(작가미상 '방한림전'), 누군가를 집요하게 스토킹하기도 하고(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아주 섹시한 성행위가 묘사되기도 하고('구운몽' 등), 도둑질을 하기도 한다.(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그야말로 부모가 싫어하고 사회가 금기시하는 천태만상이야말로 고전의 소재라고도 할 만하다.


그렇기에 그 불경함에 매료되어 고전 문학을 즐겨 읽던 나는 고전의 권위를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늘 고민이었다. 고전에서 오는 불경함은 내 학창 시절 감정의 탈출구이기도 했는데, 그 책을 들고 앉아 있으면 어른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그렇게 어려운 책도 읽냐며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셨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뜨끔해하며 '과연 저들은 이 책을 읽어 보았을까? 고전의 불경함을 알고 있을까?'생각했다.

고전은 위험하다.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향한 불만을 바탕으로 한 고전의 불경한 이야기는 독자를 성장시키고 생각을 발전하게도 하지만 준비되어 있지 않은 독자들은 상당한 충격 속에 길을 잃을 위험도 있다. 고전을 권하는 성인이라면 '과연 내 아이가 이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부러 이런 시련과 고난을 겪고 현실에 부정적이도록 날카로운 비판 정신,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는 논리적인 자아의 발전을 아이가 겪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인가? 고민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을 감내하고서도 추천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좋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부모이지만 명백한 타인으로서 자식이라는 존재에게 고통을 줄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육체의 고통만이 고통인 것은 아니다. 생각과 사고의 고통, 내가 살아왔던 세계의 모순과 균열을 보고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뒤엎는 것 또한 상당한 아픔이다. 나는 타인에게 육체적 고통을 선사할 자격이 그 누구에게도 없듯이 정신적 고통을 억지로 주입할 자격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독자 본인만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


세찬 빗줄기도 본인이 택해서 즐겨 맞을 때에야
낭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아이들은 생의 어느 순간엔가 고전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말로 우리는 긴장해야 한다. 그 때야 말로 아이들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의 세계를 부서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다시 세우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서지는 세계 안에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다소 비논리적이지만 안전한 아름다운 에덴동산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고전을 읽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이 새로 쌓을 윤리와 세상에는
더 이상 부모의 자리는 없다.
아이가 무너뜨리고야 말 세계.
바로 그곳이 우리의 자리이니까.

 


다소 민감한 이야기를 전하기에 '어쩜 그렇게 발칙하냐, 너무 부정적인 것이 아니냐, 결국 고전을 읽으면 나쁜 아이가 되는 것이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나쁜 것은 우리의 세상을 깨뜨릴 아이들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고집 센 기성세대다.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모순을 파악하며 우리가 만든 알을 깨뜨려 조금 더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고전을 읽는 똑똑하고 불경한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곳에 아이들과 함께 우리의 자리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몫의 불경함, 우리 몫의 걱정과 고난.
그리고 마침내 찾아 올 움직임.


알 안에서 곱게 성장하던 우리의 아이들은 언젠가 알을 깨뜨리고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성숙한 나비가 태어날지, 세계의 실상을 알아버린 상처받은 애벌레 한 마리가 태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여 줘야 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대신해서 알을 깨뜨려 주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부모가 깨뜨린 알에서 태어난 생명은 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그러니 부모들이여 충분히 기다리자. 준비가 된 아이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을 깨고 나올 때를 준비하자. 나의 세상에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도록 잡은 손을 놓을 준비를.  



고전은 불꽃이다. 우리가 눈감았던 날 것의 세상, 야생과 마주하여 우리를 태워 삼키는 불을 일으킨다. 고전이 이렇게 중요한 것, 우리의 세상을 바꿔놓을 그 무엇이라면, 아이들이 아닌 우리가 읽어야 한다. 불혹 즈음에 혹하여 스스로의 세상을 흔들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 드문 기회를 아이들이 아닌 우리가 먼저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과 춤추며 다양성을 포용하고
늘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중년과 노년이 가득한
멋진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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