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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y 14. 2024

불안을 다스리는 책

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 무라카미하루키 수필집, 여백서원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뉴스나 신문에서는 연일 미래 인류의 일자리, 고용 조건, 복지정책, 고용 형태 등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내어 놓기 바쁘다. 사회 구조가 바뀌면서 빈부 격차는 더 심각해질 예정이고 4차 산업에 종사하며 AI를 다룰 수 있는 인재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질 예정이다. 누군가는 20세기 노동자들의 연봉과 직업군을 결정하고 합리화하는데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던 대학마저 사라질 것이라 이야기하고 기계가 대부분의 일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인류 대부분이 절대적 빈곤자로 전락할 위험을 예견하기도 한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예측들을 읽고 접하며 나는 때로 극도로 고도화된 기계들이 대부분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애쓰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류를 상상하곤 한다. 10년, 20년 후의 근미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우리가 준비하는 일들이 과연 이 고도화된 기계들 사이에서 나의 도태를 막아 줄까? 이 사회에서 우리가 설 자리를 찾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아이들의 무해한 얼굴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기곤 한다.


AI 기술이 창의적인 일자리까지 하나 둘 점령해 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 곁에서 맴도는 우리 인류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변화 앞에서 전쟁 못지않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식과 변화의 물결에 어떻게 탑승해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하기도 한다.


특히 나처럼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면 경쟁마저도 불가능한 로봇들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최악의 수를 예상할 수밖에 없으리라.


때로 나는 난민이 될 것만 같고,
상대적 빈곤의 자리에서 미끄러져 절대적 빈곤자가 될 것만 같고,
사회에서 나의 자리를 지키며 지탱해 왔던
많은 자존감을 내려놓아야만 할 것만 같고,
일하는 보람과도 쓸쓸한 작별을 구해야 할 것만 같아 슬퍼만 진다.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보면 슬픔의 정도는 더해진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이마를 짚어가며 너희가 사는 미래는 어떨까? 어디서 행복을 느끼고 어디에서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며 보람을 구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슴이 꽉 막히고 불안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물처럼 밀려올 때면 나는 책에서 안식을 찾는다. 많은 변화가 일어날 근미래에 아이들과 내가 겪을 불안과 공포를 달래려는 목적이다. 손바닥만 한 책 속 세상에서 작은 위로를 얻고 평안을 얻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이들도 부정적인 예견이 계속되는 미래에 불안한 마음을 느낄 때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지 않고 인간이기에 아름다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리스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소중히 품어 왔던 최애들을 조심스레 풀어내 본다.


1. 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알려진 미야자와 겐지는 세계대전 시기 일본을 살다 간 작가이다. 살아 있을 때는 주목받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추후에 발견된 작품들이 재조명을 받으며 이름이 알려지고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동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그가 죽기 2년 전에 수첩에 써 두었다는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소박한 시 한 편이다. 시는 단출하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나열할 뿐이다.


100년 전 이 작가가 살았던 세상을 상상해 본다. 세계 대전의 여파가 평범한 이들의 삶마지 짓밟았던 공포와 격변의 시기, 이 작가에게도 세상은 변화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농업 사회가 저물어 가고 제국주의의 피바람 속에서 기술 혁명이 농촌 마을에까지 스며들며 전통 사회가 추구해 왔던 많은 가치들이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러한 시기를 기회 삼아 엄청난 부를 획득한 이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을 것이며 기술의 발전에도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평범한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작가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감히 100년 전 살다 간 작가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그 안에서 찾는다.


그리고 변화와 기회의 시기, 당장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부와 절대적 가난이 동시에 전개되는 세상에서 조급해지고 초조해질 때면 그의 시를 펼친다.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투자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다는 불안 속에서도 그의 시를 펼치면 순한 재료들로 부담 없이 차려낸 저녁 밥상과 주변 사람들을 향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소박한 하루를 상상하게 된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한 생명체로써의 삶이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조급한 마음으로 투자하고 기술을 배워 부자가 되는 삶도 가치 있을 것이나 지구의 한 생명으로 태어나 다른 생명에게 순수한 마음을 전하고 미래의 생명에게 빚지지 않는 안온하고 따뜻한 하루하루를 내 몫의 행복으로 채우며 살아도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말이다.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감탄할 뿐이나, 모든 이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살며 도태될 것만 같다는 불안 장애에 빠지는 이 세상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소박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개인이 할 수 있는 몫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주고 사는 삶의 방식도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건네고 싶을 때
나는 슬며시 이 소박한 시구를 교실 한 모퉁이에 걸어 둔다.


-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아.

- 많이 배우고 서둘러 결과를 이루어 내고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아도 괜찮아.

- 소박하지만 건강한 음식을 먹고 튼튼한 몸을 가꾸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줘.


나직하게 말하고 조급한 마음에 생채기가 잔뜩 생긴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안아 본다.


비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내 잇속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2. 무라카미하루키의 수필집

행여 질려 버릴까 아껴 보는 책들이 몇 권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책을 고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들이다. 꾸준히 글을 쓰고 자기 관리에 최선을 다하는 이 작가는 다양한 주제로 부지런히 수필집을 출간하고 있지만 나는 늘 그의 글에 굶주린다. 노년기에 들어선 작가에게 '부디 한 권 만 더 출간해 주세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지치지 말아 주세요.' 늘 부탁하는 마음이다. 응원하는 마음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나는 늘 호탕하게 웃는다. 작가 특유의 엉뚱한 호기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참신한 시선에 감탄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유머러스하게 비꼬는 그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서술 방식에 쾌감을 느낀다. 그의 책을 읽으면 바뀌는 세상을 보면서도 '거 참 재미있네. 이렇게나 쉽게 해결되는 일들이었다니!', '이런 멋진 기술들이 나왔구나. 그렇지만 내가 써온 것들도 그리 나쁘지 않지. 조금 불편하기에 오히려 더 멋지지 않아?' 생각하며 새로운 기술을 배우지 못해 도태된다는 조급함을 어떠한 열등감 없이 하하 호호 웃어넘길 수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새로운 세대와 그 기술을 부러 깎아내리거나 치기 어린 ‘라떼’의 논리로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산물들을 존중하고 재미있어하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재미를 취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뿌리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과 세상의 변화를 즐기면서도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콘텐츠의 가치와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 위에서 변용이 일어나고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 탄생한다.


그의 자세로 사는 삶을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과 콘텐츠를 흥미롭게 바라보되
뿌리까지 흔들리지는 않는 삶.
새로운 것이 불안으로 연결되지 않는 삶의 방식.
어디까지나 삶을 풍요롭게 운용할 콘텐츠로
새로운 것들을 호기롭게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재미있고 자유로운가.


그의 글을 통해 겁을 먹지 않고 변화하는 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조급하게 자신의 삶으로 적용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배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황금으로 지어진 궁전을 준다 해도 그는 스스로가 좋아하는 재즈 선율이 흐르고 길고 긴 달리기를 끝낸 뒤 차가운 생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소박하고 따스한 자신의 공간에 머무는 것을 너무나도 기꺼이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럭셔리한 삶의 방식을 보며 이 시대의 평범한 개개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도 우아한 삶의 방식을 배운다. 그것이 도피나 도태의 일종이라 하더라도 내 일생이 그만한 행복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면, 그만하면 좋은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의 취향으로 가꾼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한정된 내 삶의 시간 동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를 채워 나갈 재미있는 것들의 목록을 쭉 써내려 간다. 거기에는 새로운 기술들과 어떠한 불안에도 잠식당하지 않는 구태의연하게 존재하는 내 삶의 지난 이야기들이 사이좋게 놓여 있다.


3. 전영애 교수의 여백서원


https://youtu.be/pwBGKbCIx94?si=wYvj6daDewBqooxn


4차 산업혁명의 시기, 패러다임이 바뀐다고 하는 큰 변화가 예상되는 시기이지만 한국에는 우리보다 더 격렬한 변화를 겪은 세대가 동시대에 존재한다. 한국전쟁 이전, 지방에서 태어나 농경사회에서 유년을 보내고 성장하면서는 상공업 발달로 인한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며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갖은 고난을 겪은 세대,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성실하게 일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이 세대야 말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큰 변화의 물결 속에서 순수함을 지켜내고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기란 힘든 일이다. 전영애 교수의 영상에서 내가 위로를 받는 부분은 바로 이 포인트에 있다. 격변의 시기를 살아오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인간의 순수함과 존엄이 그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백서원에서 일구어 나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보면서
세상은 AI가 제공하는 정보의 바닷속에 있지 않고
내 앞에 존재하는 한 줌 흙과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결국 이 자연 앞에서, 그 거대한 흐름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는 작은 생명일 뿐이라는 데에
슬픔과 안도를 느낀다.


- 살아 봤더니, 바르게 살아도 괜찮아요. 바르게 산다고 꼭 손해 보고 사는 거 아니에요.


타인과 또는 기계와, 로봇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살아남으려 아등바등 권모술수를 쓰지 않아도, 부러 차갑고 냉정하게 삶의 일부를 끊어내지 않아도 세상은 여전히 살아갈만한 곳이라는 그녀의 말에 큰 안도를 느낀다. 이것이 그녀의 영상을 보며 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이유다. 그녀의 진실하면서도 강한 눈빛을 보면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나를 지켜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는다.



책을 읽고 영상을 보는 동안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채울 수 있는 다양한 거리들로 인생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대의 변화'라는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는 개개인의 삶을 살아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 어린 이 리스트를 건넨다. 부디 시대의 피로를 느끼는 많은 이들에게 조그마한 안식처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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