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에 주위를 보면 여러 가지 형태로 휴가를 간다. 딱 알가족만 가는 집도 있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집도 있고, 혼자 가는 사람도 있다. 해외로 가기도 하고 제주도를 가기도 한다. 바다를 가기도 하고 계곡을 가기도 한다. 캠핑을 가기도 하고 호캉스를 가기도 한다. 사람 많고 물가 비싼 여름 성수기에는 휴가 안 간다는 사람도 있다.
이 중에 가장 최고수를 뽑자면 혼자 휴가 가는 사람이다. 호캉스든 뭐든 혼자라면 남 신경 쓰고 배려할 것도 없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숙소에 가고 싶으면 가서 누워서 휴대폰을 하든 멍을 때리든 마음대로 하면 된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여행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외로움을 타는 사람은 혼자만의 여행을 애초에 기획조차 하지 않을 것이니, 혼자 휴가 간 사람이 혼여의 외로움을 느끼는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쨌든, 혼여를 계획하고 떠난 사람은 승자다. 어떤 식으로든.
부모님과의 여행에서의 십계명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떠나는 자식 쪽이 지켜야 할 십계명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지켜야 할 십계명이다.
부모님 십계명
저런 십계명을 들이밀며, "엄마, 이거 요즘 유행인 거 알아? 여행동안 이런 말 하면 안 돼. 알겠지? 자, 여기 서명해!"라는 말을 하고 출발하는 집안은 저런 십계명이 필요가 없는 집안이다. 저런 수칙을 부모에게 들이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모와 소탈하게 대화가 통하는, 나름의 유쾌함이 있는 집일 것이다. 엄마가 "야, 내 트인 입으로 밥이 맛없다, 덥다, 춥다 말도 못 하냐!!"라고 쏘아붙이는 상황도 깔깔거리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런 집은 부모님이 먼저 장난을 칠 수도 있다.
"야, 이 집에는 물이 제일 맛있네~~~ㅋㅋ 아, 이런 말 하면 안 된다 캤제?"
저 십계명을 부모님께 진짜로 보여드리며 엄중 경고를 날리는 자식은 잘 없을것 같다. 저런 말이 통하는 집은 저런 십계명이 필요가 없고, 저 십계명이 필요가 있는 집은 저런 말을 못 한다. 그래서 결국 저 부모 십계명은 모두에게 필요가 없다. 부모님 모시고 다니기가 얼마나 힘들면 저런 게 나왔겠나하는 추측이 들 뿐이다. 다른 집도 비슷하구만 하는 위안과 함께.
취향이 독특하거나, 맛집이나 핫플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데, 완고하기까지 한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는 여행은여행이라 하기 어렵다. 아예 효도관광을 목적으로 각오하고 떠난 거면 몰라도, 그 여행이 자식에게 휴식으로서의 여행이 되지는 않는다. 갔다와서 또 쉬어야한다. 여행이 아니라 가이드 생활을 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는 자식이 여행 경비도 다 낸다. 노옵션 노쇼핑 노경비 가이드투어.
이 투어는 숙소부터 일정, 날씨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을지라도, 마지막날 애써 찾아간 맛집의 메뉴판 제일 끝에 붙어있는 <김치-중국산>하나에 와장창 무너질 수 있다. 중국산 김치에 기분이 상한 부모님이 이 집은 김치를 중국산을 쓰네, 제대로 된 집이 아니네, 나는 중국산 김치 주는 집 제일 싫어하는데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 여행은 중국산 김치로 도배된 평점 0.8 정도의 별점테러 투어가 되어버린다.
오마니, 중국산 김치 한번 먹는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좀 드셔주세요... 제발요..
물이 더 맛있으면 물을 드시든가요...
그러나 부모님과의 여행보다 더 최고난도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바로 사춘기와의 여행!!!
사춘기는 저런 십계명 만들 정신도 없는지, 만들어봤자 소용도 없다 싶은지 저런 십계명도 없다. 아마 있다면 사춘기새끼들이 지켜야 될 건 무서워 못 만들고, 부모가 지켜야 될 수칙으로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십계명도 필요 없다. 한.. 삼계명 정도면 충분하다.
1. 참아라.
2. 휴대폰 줘라.
3. 억지로 어디 데리고 가지 마라.
이번 여름휴가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짧게 다녀오기로 했다. 목적지는 군산. 1박 2일.
첫날은 빨리 일정을 마무리하고 호텔로 바로 갔다. 집에서는 맘껏 틀지 못하는 에어컨을 펑펑 틀어놓고,아이들에게는 휴대폰을 쥐어줬다.그들은 유튜브와 게임을 하다가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낮잠을 잤다.평화로웠다. 첫째 날은 성공이다. 둘째 날은 조식을 먹고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갔다가 유명한 중국집으로 가서 짜장면과 짬뽕을 먹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 일정에 대해 사춘기도 동의했다. 분명히.
그. 러. 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누가 망각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나.
이 사춘기를 데리고 박물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어야 했는데, 그걸 또 까먹고 박물관에 데리고 갔다. 간다고 했어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 사춘기를 데리고 진지하게 박물관을 관람한다거나, 역사 공부 따위를 거기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본 놈들이 세운 쌀탑 사진이라도 보면서 일제시대에 대해서 1초라도 생각해 봐라 하는 마음으로 가자고 했었는데. 아. 이것도 욕심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들어가자마자 딸은 나는 안 들어갈 테니 내 표는 끊지 마라, 영국 박물관도 돈을 안 받는데 여기는 왜 돈을 받냐, 왜 이런데 와서 돈 쓰고 시간 쓰냐, 박물관 로비 디자인이 이게 뭐냐, 등대를 이렇게 유치하게 만들어놓으면 어떡하냐, 내가 옛날 학교랑 동네 모습을 왜 봐야 되냐, 진짜도 아닌 걸 왜 돈 내고 와서 보냐.... 쉴 틈 없이 불만을 쌔려 갈겼다. 결국 벤치에 그냥 앉아있으라고 하고 아들이랑만 샥샥 보고 재빨리 나와야만 했다. 아마 거기 있는 사람들 중 최단시간 관람자였을 것이다. 비싸지도 않은 관람료가 아까워 화장실 물이라도 쓰게 똥이라도 싸야 되나 했다.어쨌든 사춘기 찡찡이의 불만 폭탄에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 빨리 차로 가고 싶었다. 가자. 빨리 나가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착실한 블로거에게 모든 잘못을 다 뒤집어 씌우고 상황을 종료시키려고 했는데, 우리 딸은 역시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소유자였다.
"엄마, 그 밑에 댓글 봤어?? 댓글을 보고 엄마가 판단을 했었어야지. 그리고, 다른 글도 찾아봤어?? 블로그 그거 하나만 딱! 보고 여기 괜찮네! 여기 좋네! 여기 가봐야겠네!라고 생각한 건 엄마가 잘못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찾아? 뭘 찾은 거야? 뭘 본거야? 검색을 똑바로 해야 될 거 아니얌어미냥러마ㅣ욺;내ㅑ도굽망노ㅜㅍㄹ나옯지다;ㅗ룸ㄴ이멋;덤ㅇ나ㅣ러매;ㅑㄷ솝지ㅑㅇ러내역배ㅔ저두란어ㅜㄻ냉ㄻ"
하..... 그래 내가 죽일 년이다.
고마하자. 이제 진짜. 제발.
이제 박물관은 죽을 때까지 가자는 소리 안 할게.
더워 죽겠는데 기어이검은색 후드티를 이틀째 주워 입고 다니는 딸이 주차장으로 가면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