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도 많고 보강도 많다. 정규시간은 5시부터 8시까지인데 숙제나 오답 수정이 완료되지 않으면 10시까지 남겨서 보강을 한다.
보강을 해야 되는 상황인데도 보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엄마의 전화」이다.
이를테면, "오늘 OO이가 어디 갈 데가 있어서요, 혹시 보강해야 되면 다른 날 해주시고 오늘은 보내주세요. 죄송합니다."라는 전화를 엄마가 카운터에 걸어주면, 그날은 보강을 안 할 수 있다.
그날은 우리 딸이 아주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수학학원에 나서던 참이었다.
숙제를 덜 했기 때문이다. 보강을 하고 와야 할 판이다.
"오늘 보강하지 말라고 전화해 줄까?"
물어봤지만 들은 척도 안 하고, 신발을 탁탁탁 신고, 현관문을 쾅! 닫으며 온몸으로 화났다는 표시를 내며 나가버렸다.
"저 싸가지 없는 ㄴ..."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저 외계인의 행동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다.
Yes인가 No인가?
'보강을 안 하면 무조건 좋아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성급히 내서는 안 된다. 오늘 보강을 안 한다고 그것이 삭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되기 때문에 따님의 의중을 똑바로 파악해야만 한다.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가 핵폭탄을 맞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확실한 "Yes"가 아니면 섣불리 행동에 옮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늘의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는 "No"의 시그널로 해석하기로 했다.
9시가 되었다. 보강을 하지 않았다면 딸이 왔을 시간이었지만 딸은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보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 숙제는 덜 해갔어도 보강은 하고 오려나 보네. 기특하군. 생각하는 순간, 딸이 보낸 문자가 왔다.
딸 : 학원에 전화해 준다며? 안 했어?
지금 보강하잖아
나 : 아까 물어봤을 때 너가 대답 안 했잖아.
전화하지 말라는 건 줄 알았지. 지금 해줄까?
딸 : 됐어
왐마. ㅈ됐다. 판단미스...
오늘 그녀의 무응답은 "Yes"였다.
망했다.
진짜 망했다.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또 죄인이 되었다.
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미친 듯이 온다.
우산도 안 들고 갔는데, 학원차에서 내릴 때 안 데리러 가면 무슨 욕을 들을지 모른다.
빠질 것이라 생각했던 학원 보강을 10시까지 꾸역꾸역 하고 오는 그녀가 쏟아지는 폭우까지 쫄딱 맞는다면 이승에서의 딸과의 인연은 여기에서 종결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 공포 그 자체.
학원 차에서 내리려면 한참이 남았지만 보강을 안 하고 싶다는 그녀의 속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자신을 벌주는 의미로 우산 두 개를 들고 서둘러 학원차가 내려주는 곳으로 갔다.
온 동네의 학원차가 종류별로 섰다가 아이들을 우르르 내리고 다시 출발했다.
불쌍한 대한민국 청소년들.
이렇게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하루종일 공부하는데 왜 다들 공부를 못할까.
불쌍한데 그 생각을 하니 더 불쌍했다.
얘네도 불쌍하고 그들과 다른 처지일 리 없는 우리 딸도 불쌍하고, 비 와서 내가 나와있다고 말하려고 전화를 해도 계속 전화를 씹히고 있는 엄마인 나도 불쌍했다.
주인님. 전화라도 좀 받아주면 안 됩니까.
아. 애처롭다. 고생한다. 힘들겠다. 너네도.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사교육과 교육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차 학원에서 한 무리가 또 우르르 내렸다.
어! 걔다.
우리 딸이랑 유난히 안 맞는 그 친구.
어릴 때부터 앙칼진 목소리로 잘난 척하던 게 내 눈에도 거슬렸던 그 친구.
얼마 전 자기가 한 일을 우리 딸에게 덮어씌워 우리 딸의 친구관계에 대폭풍을 몰고 왔던 기집애.
우리 딸도, 나도 감정이 좋을 리 없는 그 친구가 학원차에서 내렸다. 못 본척하고 앞을 보고 있는데,
"야, 내가 XX한테 들었는데, XXX(우리 딸 이름) 있잖아,"
라고 하는 그 친구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귀에 내다 꽂혔다.
어, 뭐야, 니 입에서 왜 우리 딸 이름이 나와?
고개를 홱 돌려서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상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아주 흥미롭게 옆 친구에게 뒷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그 아이는 우산 속에서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슬로우 걸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 OST 깔아주세요)
.
.
.
.
0.1초쯤 될까.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친구는 나를 알아보더니,
"헉"하며 한 손을 자기 얼굴로 가져가 입을 막았다.
입틀막.
그래, 니가 지금 할 일은 입을 틀어막는 것 뿐이야.
여기서 더 입을 놀렸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니?
나는 한번 째려봤고, 그 친구는 입틀막을 하며 지나갔다.
그 친구는 우리 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듣지 않았고 사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찰나의 눈 마주침이 있었고, 나는 그 순간 강한 레이저를 쏘았을 뿐이다.
하지만 통쾌했다. 이때까지 우리 딸이 당했던 수모와 음해공작에 대한 응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통쾌했다.
어디 구석진 곳으로 불러서 혼쭐을 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이긴 거 같은데. ㅋㅋ
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확실히, 나는 아직 철이 없다.
중학생한테 레이저 한번 갈겼다고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뭐래. 선생 될 자격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뿌듯하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사람을 욕하려던 순간에 그 사람의 엄마가 내 눈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친구도 아주 진귀한 인생 경험 했을 것이다. 오줌 지렸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