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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Sep 24. 2024

책이랑은 자만추로 만날게요

책도 조건을 따져봐야 해서요


우리가 즐기는 문화 중에 가장 취향을 많이 타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드라마, 음악, 음식, 여행, 독서.. 를 우리가 즐기는 것들이 가깝고 가벼운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책은 어쩌면 우리가 하는 문화생활에서 취향 타기로는 최상위 레벨에 있는 듯하다.

맛집에 같이 가고, 영화를 같이 보는 친한 친구도 책은 같이 보기 힘들다.


어떤 하나의 책과 내가 만나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긴 여정을 함께 하려면, 그 책과 여러 번의 스파크가 튀어야 한다. 소개팅보다 어렵고, 소개팅에서 애프터, 삼프터를 받는 것의 확률보다 더 높은 확률로 나와 동해야 한다.


일단, 첫 만남의 스파크가 중요하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길어봤자 폭 2cm 정도로 수줍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책등이 첫인상을 결정한다. 책등의 전체적인 색감과 10글자 내외의 제목과 그 서체가 나를 유혹해야 한다. 스쳐가는 수많은 책 중에 책등 하나로 나를 홀려, 내가 그 책을 서가에서 꺼내어 손에 들기까지 했다면, 그 책과 나의 소개팅은 반쯤은 성공이다. 주선자가 보내준 희미한 프로필 사진으로 서로 OK를 날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후, 저자의 소개와 프롤로그에서 2차 스파크가 일어나고, 목차에서 나를 완전히 유혹해 154페이지에 있는 어떤 챕터를 펼쳐서 페이지 정도 읽었다고 하면, 나는 이미 그 책에 매료되어 넘어갔다. 그 부터 그 책은 나의 것이고, 그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시공간도 그 책이 소유한다. 나 혼자 마음껏 즐기고 맛보면 된다. 각각의 책장과 문장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하든지 그것은 나의 자유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나 자신만 알고 있다. 그 어떤 도덕과 법의 재제도 없다. 누구를 죽이든 살리든, 바람을 피우든 말든 그 세계 안에서는 나는 자유다. 책을 읽는 동안 느껴지는 감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휘두를 때, 이 책의 플러팅에 넘어간 내 자신이 살짝 자랑스럽다. 이 책이 나를 살짝 들어 다른 세계로 옮겨놓거나 이 세계에서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준다는 느낌이 들어 이 책과의 만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 찌릿찌릿 전율이 온다.


물론 프로필 사진에 혹해서 소개팅에 응했지만 만나보니 뽀샵빨이어서 완전히 실망한 경우가 있듯이, 책도 서가에서는 나를 홀렸지만 진지하게 읽다 보면 '코드 오류. 접속 실패'에 해당하는 케이스도 많다. 그러면 책과는 이별해야 하는데, 책은 감정이 없으므로 매몰차게 이별해도 괜찮다. 화를 내며 중간에 덮어 버리거나, 중간까지 읽은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끝까지 읽거나, 얼굴 본 적도 없는 작가에게 미안해서 의리로 끝까지 읽거나,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결말이야 어찌 됐든, 입 없는 책은 말도 못 하므로 책과의 결말은 내 마음대로 지으면 그만이다.



책을 읽게 되면 수많은 세계와 만나게 된다.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세계를 오가다 보면 꼭 누군가가 생각날 때가 있다.


이 구절은 얘한테 좋겠네.

이 문장은 이 사람한테 딱이네.


누군가에게 딱이다 싶은 책은 그에게 들이밀고 싶다.

내가 찾은 좋은 책과 문장은 자꾸 추천하고 싶다.

어떤 문구가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면 사진 찍어 보내고 싶다.

그런데 꾹꾹 참는다.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다.

내가 싫어서 참는다.


나는 반골 기질이 있어 무언가를 하려다가도 누가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진다.

누가 나에게 '이거 좀 봐봐, 이거 좀 읽어봐'하며 보내주는 책과 유튜브 링크들은 나의 간택을 받지 못하고 한참을 대기해야 한다. 위트있는 짧은 개그나 웃긴 영상들은 가볍게 보지만, '인생 사는 법, 자식 키우는 법, 마음 다스리는 법' 이런 주제들로 온 링크들은 거의 클릭도 못 받고 이전 대화 목록으로 사라진다. 나에게 도움 되는 것들은 내가 직접 찾고 내가 선택한 것들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면 , 그에게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존경심을 기반으로 한다면 그가 추천해 준 책은 얼마든지 리스트에 올려둘 것이다. 취향과 관심이 딱 맞아떨어지는 독서메이트가 있어서 서로가 서로의 책을 골라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을 것이다. 서로의 책을 공유하고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눈다면, 이것이야 말로 영혼의 단짝 아닌가.

하지만 독서의 단짝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기 계발서를 읽고 인생이 달라지지만, 누군가에게 자기 계발서는 '너는 이거 다 실천해서 얼마나 잘 사냐'하는 반감만 불러오는 책일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 소설은 다른 우주로 가는 통로가 될 테지만, 어떤 사람에게 소설은 있지도 않은 것들을 펼쳐놓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재테크에 미쳐있는 사람에게는 재테크 책이 성경과 같을테지만, 재테크에 관심없는 사람에게 재테크책은 불교 신자에게 들이미는 구약성서 창세기 같은 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책은 선물하기에도 조심스럽다.

나 혼자 재미있게 본 영화를, 친구에게 강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고 표를 끊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더구나 그것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책이라면,

나는 그에게 책 읽고 잘난척하는 인간 밖에 더 되겠는가.


진짜 추천하고 싶어 미치겠을 때는 시어머니를 생각해 본다.

'이 책이, 이 구절이 너가 읽어보면 참 좋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나에게 시어머니가 이것을 보내도 내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네 감사합니다. 꼭 읽어볼게요!' 말만 하고서는 속으로는 '뭐야, 이걸 왜 보내셔.'라고 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본다. 그러면 보통은, 그냥 참게 된다.


사람은 원래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 한다.

책도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책도 직접 골라야 한다.

보고 싶은 책을 알아서 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봐서 좋은 책이 그에게도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책과는 자만추가 필요하다.

내 가장 친한 친구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어 입이 근질근질거려도, 참아본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에게는 추천하지 않고 안 친한 사람들에게 추천해 보려고 이 글을 쓴다.

천성이 선생이라, 좋은 것을 보면 말 안 하고는 못 배기겠는데 참느라 힘들다.

나는 대단한 독서가나 문장가도 아니라 멋들어진 서평이나 추천사를 쓸 능력도 없다.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하여 글을 써본 적도 없다.

그러나 브런치에서는 교양인들이 많아서 어쩌면 나의 책 추천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나와는 친한 사람들이 없어 고깝게 생각할 사람들도 없으니

내가 좋았던 책들을 마구 추천하고 싶다.






여기서는,

여기 브런치에서는 책을 추천해도 될까요?

어차피 읽고 보는 것은 또 여러분들의 마음이니,

제가 여기에 책에 대한 글을 써서, 저의 추천으로 여러분이 그 책을 손에 쥐었다 한들, 

그것도 그 자체로 자만추 아닙니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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