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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Sep 10. 2024

돈도 됐고요, 그 입 좀 막으실래요?

명절 잔소리 메뉴판에 대한 소고


드디어(?) 추석이 다가온다.


이제 청춘에서 진정으로 멀어져서 그런가, 주변에 추석 좋아하는 사람이 잘 없다.


학교, 학원도 없이 쉴 수 있어서인지, 아직은 어린 우리 아이들은 좋아한다. 숙제 없이 쉬어서 좋고, 맛있는 거 먹어서 좋고, 인사만 해도 어른들이 오만원, 십만원씩 용돈도 쥐어주시니 그것도 신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고등학생만 되어도, 딱히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곧 있으면 1차 지필고사를 앞두고 있어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 (물론 공부 따위 제대로 안 하겠지만) 스터디카페에 가서 공부할 계획을 잔뜩 세워놓고 사람 많은 친척 집에 안 갈 핑계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 추석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유를 댈 가치도 없다. 집에 있는 내 새끼 한두 명 밥 차리고 치우는 것도 힘든데 두 세 가족만 모여도 1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의 끼니를 준비하며 손님을 치르는 일은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명절만 아니었다면 이런 노동은 안 해도 됐을텐데. 아. 나도 연휴에는 그냥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연락하시라. 싸워봅시다. ㅋㅋ

심지어 명절에 만나서 크게 반가운 사람도 없다. 내 삼촌, 숙모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일상에서 해본 적이 잘 없는데, 시가 쪽 친척들과의 만남은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 남편의 당숙어른이나 남편의 육촌동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겠다.)


예전에는 몰랐던, E와 I로 구분되는 성향에 따라 분류 지어진 내향형 I들은 배로 힘들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기 빨리는 행위라는 것을 파악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주말이든 쉬는 날이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형들에게는 명절에 친척들을 대거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 폭탄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저런 분류라도 있어서 '아, 내가 이런 모임에 오면 기가 빨리는 성향이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


명절이 달갑지 않은 여러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내 허락 없이 훅훅 들어오는 반갑지 않은 잔소리일 것이다.

기사도 많다. 잔소리 때문에 친척집 가기 싫다고 하는 기사들.


오죽하면 이런 것이 있다.

명절 잔소리 메뉴판.



'잔소리할 거면 돈 내고 해라' 이거다.  



이건데 근본적으로는 '듣기 싫으니 입 닥치세요'하는 의도겠으나, 돈이라도 주면 저런 싫은 소리 정도야 감내하겠다는 같아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

더 자존심이 상한달까, 자본주의에 내 자존심을 굴복시키는 느낌이랄까.

그 질문을 듣기 싫다는 것은 그 듣기 싫은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의 초라함이 반영되어 있다. 어쩌면 현실의 나의 모습을 파악하고 있어, 저 잔소리와 질문들이 공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ㅋㅋ 못해서 열불이 터짐

만약에 이렇게 대답한다면?


"요즘 공부는 좀 하니?"

 - "네. 저 내신 전과목 1.0 이고, 수능도 다 1등급 매번 나와서 의대는 걱정 없이 갈 것 같아요."


"요즘 돈은 좀 잘 버니?"

 - "네. 작년 연봉은 한 20억 정도 받았는데 내년에는 더 올려준다고 하더라고요. 연봉이 20억이면 뭐해요, 서울에 제대로 된 집도 못 사요. 세금도 반이나 떼가고. 보험료도 진짜 많이 낸다니까요. 작은 아버지도 제가 낸 보험료로 병원 다니시는 거 아시죠? 하하하"


"집은 샀니?"

- "아유, 그럼요. 집은 돈 있을 때 바로 사야죠. 사람들이 떨어진다 떨어진다 하는데, 다 돈 없는 사람들 소리예요. 저희 집은 몇 년 전에 50억에 분양을 받았는데 요즘 100억으로 올랐더라고요. 그때 10억 밖에 차이 안 났는데 한강이 좀 더 잘 보이는 집으로 갈아탈걸 그랬어요. 그 집은 지금 130억이거든요. 아까워 죽겠어요. 돈 버는 사람들은 따로 있나 봐요. 저는 진짜 운이 없어요. 그래도 뭐, 살아야죠. 어떡해요."


"애들은 대학은 잘 갔어?"

"응. 둘째는 올해 의대 입학했고, 첫 애는 미국으로 대학 갔잖아. 거기서 또 대학원 다니고 공부하고 있어. 돈 든다고 들어오라고 해도 자기는 공부가 너무 좋대. 둘째는 내가 별거 해준 것도 없는데 혼자 척척 공부해서 의대를 가주니 내가 정말 고맙지. 그래도 걔는 돈 때문에 의대 간 거 아니야. 공부를 좋아해. 애들이 왜 이렇게 공부만 하는지 몰라. 아유, 정말 답답해. 사람이 돈 욕심도 좀 있어야지. 그래도 아들들이 어찌나 딸 같은 아들들인지 멀리 있어도 매일 사랑한다 보고 싶다 난리야 아주. 그거에 만족하고 사는 거야." 

(끝 안 남.  오백배 길게 계속 이야기함.)



그 어떤 질문에도 이런 핵펀치를 날릴 수 있다면야

무슨 질문을 한들 뭔 상관인가?

바로 입틀막 시켜버릴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는 저런 핵펀치를 날릴 수 없는 쭈구리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저런 핵펀치를 날릴 팩트가 준비되어있지 않다.

내신 1.0의 성적도, 20억 연봉도, 100억짜리 집도, 공부 잘하고 효도하는 자식새끼도 없다. ㅠㅠ 엉엉


인터넷에서는 잔소리 대처법이라고

하는 질문마다 "그러게요"를 영혼 없이 시전 하거나

"삼촌은요? 연봉 얼마예요? 노후대책은 되어 있으세요?"라는 말로 응수하라고 나온다.

친척들 수십 명 앉아있는 가운데, 멀쩡한 인간도 유교걸 유교보이가 되고야 마는 명절에 저런 소리로 되받아칠 수 있는 용자는 사실 잘 없다. 다들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못 하니까.. ㅎ


출처: 매거진 한경 JOB&JOY



저런 무례한 근황 토크를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어른들이 말할 주제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스몰토크에 미숙해서 그런 거라고, 그들 나름대로의 관심의 표현이니 이해해줘야 한다고 어디서 들었다. 할 말이 없어서 학생한테는 공부는 잘하냐, 취준생에게는 직장은 어떻게 됐냐, 얼마 전에 결혼한 조카에게는 애는 언제 낳을 거냐, 어쩌고 묻는다던데.

토크 기술이 부족하여 아픈 곳만 콕콕 찌르는 그 어른의 무례함을 왜 내가 감당해야 하는가.


'걸러들어라, 흘려들어라, 그냥 하는 소리다'는 말이 나는 진짜 웃긴다.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을 배려해서 조심해야지, 왜 듣는 사람한테 걸러 들으라고 하는 것인가!!

듣기 싫은 소리 자기 마음대로 씨불대놓고 듣는 사람 기분 다 잡쳤는데 못 들은 걸로 하라니!!

뭔 개소리인가!!



휴. 워워.

진정타임.





어쨌든, 가족끼리 모이면 그냥 오랜만이네 하고,

주변에 맛있는 커피집이나 찾아서 나가서 차 한잔이라도 하면서 집안 인구밀도나 좀 낮춰주자.


요즘 힘든 건 없는지, 운동은 좀 하는지 그런 거나 이야기하자.

진짜 할 말 없으면 임영웅 근황이나 나누어보자.

괜히 집을 샀네 마네, 누구는 무슨 대학을 갔네, 살이 쪘네, 뚜껑이 다 날아갔네 하지 말고.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남의 일에 얄팍한 관심을 갖는 순간 저런 요상한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이때까지 관심 없었으면서 갑자기 관심 있는 척하지 말자.

남의 일은 먼저 묻지 말고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만큼만 같이 떠들어주자.

(그것도 자랑이면 좀 재수 없긴 한데. 표정이 어차피 썩을 거니까 그걸로 그냥 퉁치는걸로)





'어차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책이 있던데,

명절에 만나는 친척들은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

쇼펜하우어 형님 좀 만나고 오세요.


제발 관심 좀 갖지 마세요.

질문 좀 그만하세요.

돈도 필요 없으니까 그 주책맞은 입을 좀 막으세요. 제발.







* 추신 *

저 포함 모든 분들이 평화로운 명절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다툼 없는 명절 되소서..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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