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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봉봉 Dec 03. 2024

아이젠 끼고 수영장에 뛰어가는 여자

가끔 부린 똘끼가 주는 힘

지난주 목요일.

폭설이 내린 날.

수영장 가는 날.


기상관측 이래 117년 만이라던가.

11월에 가장 눈이 많이 온 날이라던가.

전날부터 내린 눈이 온 세상을 가득 덮었다.

아침부터 등교시간을 늦춘다는 문자가 왔다. 

아무래도 눈 오는 게 심상치 않다며

휴교해야 되지 않냐며

동네 맘카페가 시끌시끌하더니

결국 학교는 휴교한다는 알림이 왔다.


눈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아이들 등교도 늦게 하면

수영장은 못 가겠다 생각했는데

휴교라 아이들은 집에 좀 버려놓아도 되니 

갑자기 격하게 수영장으로 가고 싶어졌다.


수영장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수영장 가시는 분?"

"눈이 너무 많이 오는디ㅋㅋ"

"애들도 집에 있는데 ㅋㅋ 수영장 가도 될 듯"

"오세요. 수영장에서 만나요ㅋㅋㅋㅋㅋㅋㅋ"


도로 상황을 보니 운전은 미친 짓이고.

어떡할까, 하다가

겨울의 한라산이라 생각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한라산 보다야 낫겠지.


"저 아이젠 끼고 갑니다. 수영장 나오세요 ㅋㅋㅋ"

"헉! 아이젠? ㅋㅋㅋㅋㅋ 대박 ㅋㅋ"


수영장에서 집이 제일 먼 내가

아이젠까지 끼고 나선다고 하자

원래 걸어오던 멤버들이

집도 제일 가까운데 우리도 안 갈 수는 없다며

짐을 챙겨 나오겠다고 했다.


털신을 신고, 아이젠을 챙겼다.

"아이젠은 좀 오바인가?"

긴가민가 했지만 일단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섰다.

세상에, 우리 동네에 눈이 40cm가 넘게 왔다더니

진짜 그냥 신발로는 걸을 수가 없는 길이었다.

아파트 정문을 벗어나자마자 아이젠을 바로 끼웠다.


그러고서는 부스터를 단 듯 성큼성큼 걸었다.

하천길에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무들이

쩍쩍 갈라지거나 꺾여 있어서

산책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 밑으로 기어서 통과하고

쓰러질까 위태위태한 나무 옆를 지날 때는

머리통이 가격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재빨리 지나가야 했다.

수영장 가는 길이 정글탐험 같았지만

나의 발에는 무적의 아이젠이 끼워져 있었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폭설에 꺾여버린 불쌍한 나무들.. ㅜㅜ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살살 걷는 사람들을 앞지르며

보란 듯이 샥샥 뛰어 제쳤다.

아무도 안 밟은 눈길을

아이젠을 낀 신발로 쿡쿡 찍어 밟았다.

미끄러지지도 않고

겁도 없이 낼름낼름 뛰어다니는 나를

다들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런 날에는 아이젠을 준비하셨어야죠.

모든 것은 장비빨 아닙니까. ㅋㅋ


걸어가는 것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아이젠을 끼고 축지법을 한 셈. 유후.


그렇게 복잡하던 탈의실과 샤워장이 텅텅 비었고

초급반 레인에는 1명이 달랑 있었고

중급반 레인에는 나 포함 3명이 와 있었다.


오메 뿌듯한 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몇 명이 더 왔지만

수영을 등록한 이래 가장 쾌적한 인원으로

가장 빡센 수영 강습을 했다.


"오늘 같이 사람 없는 날 접영하자~ 얼마나 좋아~"

어떤 열혈 선배님의 제안(?)으로 접영만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헥헥.



수영을 마치고

우리 스스로에게 상을 줘야 한다며

오늘 눈을 헤치고 수영장에 온 멤버들과

수영장 앞 카페에서

눈 오는 풍경을 보며

아이스라떼를 맥주처럼 들이켰다.

눈 쌓인 수영장 앞에서

인증샷을 남긴 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올 때도 아이젠을 끼고서

눈 밭의 설인이 되어 성큼성큼.


눈밭의 뿌듯한 오리발


누구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도

인생이 모자라다며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라고 한다.

누구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며

힘든 일부터 먼저 하라고 한다.


 말을 한 사람들도

이 둘 중에 방향만 선택해서 살아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필요할 때 알아서 잘 써 먹어야지.


조금 힘들면 다 미루고 누워있어도 괜찮고,

어떤 날에는 살짝 나를 채찍질해서 몰아붙여도 괜찮다.

이걸 왜 미루고 앉아있냐-

못난이 쭈구리가 된 상태로 이불속에 있어도 괜찮고,

와- 내가 이걸 해내다니!- 

어려운 것을 해내고 우쭐한 기분에 심취해 있어도 괜찮다.




눈 오는 날의 똘끼들


하기 싫은 일도

일단 시작해서 하다 보면

시작할 때보다는 할만하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드는 일들은

어렵거나 힘들거나 귀찮거나 하는

카테고리 중의 하나일 텐데,

그 어떤 종류라도 시작만 하면,

관성이 작용하므로

슬금슬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포기도 귀찮다.

그래서 찔끔찔끔 더 하다 보면

'이때까지 한 게 아깝다'는 생각에

조금씩 더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마무리도 짓는다.


"내가 이런 것도 해봤지"

하는 경험이 주는 힘이 있다.

가끔 부린 똘끼가 이상한 자신감을 안겨 줄 때가 있다.



"시작이 반이다"와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가 합쳐지면

시작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완성이 되어버리는 기적이 생긴다.


그러니까 하기 싫고 귀찮고 어렵고 힘든 일도

똘끼를 갖고 그냥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엉겁결에 끝까지 하고 나면

의외로 뿌듯할지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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