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작

측두엽 뇌전증

by 경조울

의학을 처음 배우던 꼬꼬마 의대생 시절에 교수님은 강조하셨다. 한 환자가 다양한 증상을 보여도 이는 하나의 질환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진단을 찾으려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를 단일 질환 패러다임(single disease paradigm)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의료계에서 고수되었던 원칙 중 하나이다.

그러나 반 고흐의 경우엔 하나의 진단만으로 모든 증상을 설명하는 것이 영 불가능하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가 자주 보였던 발작이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나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발작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동안 네 번의 심각한 발작을 겪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그리고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
1889년 4월 반 고흐가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반 고흐가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해도, 반복되는 발작만큼은 정신 질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학계에서는 반 고흐가 측두엽 뇌전증을 앓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뇌전증은 뇌의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함으로써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그중에서 반 고흐가 앓았을 것이라 추정되는 측두엽 뇌전증은 성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발작이 발생했을 때, 환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있거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거나 여기저기 배회하기도 한다. 이를 복합부분발작이라고 하며, 입술을 핥거나 씹고, 삼키는 등 무의식적으로 간단한 행동을 보이는 자동증을 자주 수반한다. 이러한 발작 후에는 혼돈이 발생하여 환자는 발작 중 본인이 보인 언행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러한 특징은 반 고흐가 묘사한 증상과 일치한다.

실제로 아를에서 귀를 자른 뒤, 처음 그를 진찰한 당직 의사는 당시에는 잠재성 간질이라고 알려진 뇌전증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항경련제인 브로마이드를 처방하였다. 실제로 치료 효과가 있어 반 고흐는 빠른 호전을 보였고 2주 만에 퇴원한다.

측두엽 뇌전증이란 진단이 반 고흐의 증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복합부분발작의 경우 짧으면 몇 분, 길면 몇 시간 유지되기 때문에, 반 고흐처럼 며칠, 몇 주나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반 고흐의 발작에 대한 기록에 구체적으로 자동증이 명시되지 않아 측두엽 간질로 보기 어렵다는 반박도 있다(Hughes, 2005)


반 고흐는 퇴원 후에도 환청과 환시, 피해망상으로 인해 재입원을 해야 했고, 두 번째 퇴원 후에는 주민들이 그를 강제입원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1989년 5월, 반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하게 되며, 이후에도 수 차례 발작을 겪는다.

최근 진위가 밝혀진 반 고흐의 작품 중에 바로 생레미에 입원하던 시절 그린 작품이 있다. 음울한 표정과 생기 없는 얼굴, 삐딱한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작품이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소장되어 있는 반 고흐의 자화상은 1970년대부터 진위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202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 전문가들이 이 작품이 진품이 맞다고 밝혔다. 반 고흐가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 그린 자화상으로는 이 작품이 유일하며, 이로 인해 더욱 독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빈센트 반고흐, <자화상>, 1889, 유화, 52 x 45 cm,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오슬로, 노르웨이


반 고흐는 생전에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고, 작품성만 본다면 이 작품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 많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 고흐의 자화상은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라색 배경의 자화상이다. 그 자화상에 비하면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자화상은 거친 붓질이 투박하며 완성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예술품으로써의 완전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림을 그리려 애썼던 반 고흐의 의지와 열정에 있다. 이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신변이 자유롭지 못한 구속 상태에서도 그가 그림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려 했던 발버둥이 느껴지고, 이 때문에 작품이 더욱 숭고하게 다가온다.



<참고 문헌>

Hughes JR. A reappraisal of the possible seizures of Vincent van Gogh. Epilepsy Behav 2005;6:50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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