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
반 고흐가 평생 동경한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밀레일 것이다. 파리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실주의 화파의 창시자였던 밀레는 농촌의 전원생활을 주로 그렸고, <만종>, <이삭 줍기> 등으로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 화가이다. 반 고흐는 미술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파리에서 열린 한 경매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단숨에 빠져들었고, 그를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부르며 추앙했다.
밀레는 젊은 화가들이 모든 문제에서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1885년 4월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모사하면서 단순히 존경을 넘어 밀레의 화가로서의 신념을 닮고자 했다. 이른바 '동일시'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부모를 모방하며 성장한다.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것도, 걷거나 뛰는 것도 모두 가까운 성인들이 하는 행동으로부터 학습한 것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동일시는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인물을 분석하고 그 사람의 태도, 가치관,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반 고흐에게 있어 밀레는 '이상적인 농민 화가'였다. 그는 상시에가 쓴 밀레의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밀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농부라는 직업을 가장 신성하게 여겼다. 이는 "나는 농부로 태어났고 농부로 죽을 겁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땅에 머무를 겁니다"라는 밀레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밀레는 그 시절 유행하던 농촌화와 사뭇 다른 그림을 그렸다. 농부를 심미적으로 아름답게 그리거나 농사일을 통해 근면성실의 교훈을 담은 농촌화를 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밀레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을 가장 순수하다고 믿었고, 그런 순수함을 화폭에 옮기고 싶어 했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을 쫒으며 화가 스스로 작품 속 인물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자세는 반 고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건, '문제는 거기에 나막신을 신고 가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농부들이 만족하는 종류의 음식, 음료, 옷, 숙소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지.
밀레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는 정말이지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그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며, 그가 말한 것을 전적으로 믿는다.
1885년 4월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반 고흐는 자연을 사랑했다. 그도 밀레처럼 농부의 일상, 해가 뜨면 일어나 밭을 갈고 해가 지면 보금자리로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가장 아름답다 믿었고,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그런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끝없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밀레처럼 혹은 밀레의 그림 속 농부처럼 수수한 삶을 살고자 했다.
동일시가 방어기제의 형태로 작용하게 되면, 즉 고착화되어 버리면 한 사람의 개성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반 고흐가 단순히 밀레의 작품을 베껴 그리는 것에 멈춰버렸다면, 한낯 무명의 화가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 고흐는 밀레를 동일시하며 화가로서 그의 신념과 가치관을 흡수하면서도 화가로서 자신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본인만의 화풍을 세우고 수많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밀레를 오마주한 반 고흐의 작품을 좋아한다. 밀레에 대한 존경심을 한껏 표출하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오롯이 담아냈기에 '밀레를 주제로 한 반 고흐의 시리즈물'을 보는 듯하다. 밀레의 원작과 반 고흐의 모사 작품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제로 1998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밀레/반 고흐 전>이 열리기도 했단다. 비교전까지는 아니지만 국내에서도 2016년에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전-이삭 줍기(밀레의 꿈, 고흐의 열정)>이 열리기도 했다. 밀레 원작의 잔잔하고 평화로운 색감도 좋지만, 반 고흐의 모사 작품을 통해 화려한 색채를 덧입은 밀레의 작품을 새롭게 즐길 수 있다. 특히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씨 뿌리는 사람>을 좋아한다. 밀레의 작품 속 농부가 자연에 순응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면, 반 고흐 작품 속의 농부는 순응의 정도를 넘어 현실을 즐기는 것처럼 활력이 넘친다. 원작에선 찾아볼 수 없는, 작열하는 태양이 작품에 생기와 에너지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