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추운 겨울은 함박눈을 인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듯 뽀얗고, 수북하게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정민은 누나 혜민과 함께 눈사람 만드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옆에서는 키우던 셰퍼드인 깜순이가 자기도 예술작품을 만드는데 동참하고 싶다는 온갖 난리법석을 떨었다. 정민과 혜민의 엄마인 세란은 남편 준식과 함께 밖에서 자녀들이 몰두하느라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 체 옆에서 타는 장작과 함께 방금 내린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지긋이 바라봤다. 정민의 나이는 7살이었고 누나 혜민은 한 살 많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8살이었다. 한 살 터울밖에 안 되다 보니 허구한 날 싸워댔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떨어대던 남매였다. 정민의 집안은 부유한 삶을 살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먹고, 마시고, 입으며 지독하게 추운 겨울을 자신들의 분수라고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는 어느새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들 가정이 서민들과는 다른 공기를 마신 것은 아니었다. 세란과 준식은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이제 막 세란은 정민의 누나인 혜민을 임신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자녀가 태어났고 혜민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정부를 고용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아이가 생기니 돈 들어갈 곳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몸으로 야근, 특근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란은 평일에 아이를 돌봐주던 가정부가 사정이 생겨 출근할 수 없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월차를 쓰게 됐다. 집안일과 아이를 키우는 일은 회사일 그 이상 고됐지만 평일에 쉰다는 사실만으로도 세란은 해방감을 느꼈다. 혜민은 그런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하루가 멀다가 울어대다가 감쪽같이 울음을 멈췄다. 저녁이 되자 남편 준식이 퇴근하고 들어왔다. 얼굴은 온 세상 걱정근심은 혼자 지고 있는 듯이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세란은 남편과 함께 오랜만에 삼겹살파티를 할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침울한 표정을 보고는 달뜬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혜민은 갑자기 서운함이 몰려왔지만 애써 마음을 억누르고 남편을 밝은 체를 하며 반겼다.
"여보 왔어? 오늘도 고생했어. 여보 좋아하는 삼겸살 먹자 빨리 씻고 나와"
애써 웃으며 말하는 세란의 노력에 준식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세란은 서운함 마음은 싹 가시고 걱정이 밀려왔다. 평온할 것만 같았던 하루가 갑자기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고 왜 인생은 이렇게 어리둥절할 만큼 혼란스럽고 물 흐르듯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세란은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펄펄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저어가며 국그릇에 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럴수록 아내로서 밝게 대해야 한다는 생가에 먼저 삼겸살을 굽고 준식이 나오면 한 움큼 입에 싸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왜 기분이 다운됐는지 이유는 물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막 씻고 나온 준식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리는 제대로 말린 것 같지도 않고 옷도 심지어 거꾸로 입은 상태였다. 세란은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다가 멍한 상태의 준식을 보고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세란은 준식에게 맛있게 차려놨으니 서둘러 앉으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준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여보 나 회사 그만뒀어"
세란은 갑작스러운 준식의 말에 손을 떨고 있는 남편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된장국이 끓는 소리가 집안에서 가장 큰 소리를 차지할 정도로 적막이 흘렀다. 세란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왜?"
"나 사업하고 싶어"
세란은 사업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진저리가 났다. 이유인즉슨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왔고 어떠한 결실도 보지 못한 체 고생만 하다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그 죄책감에 세란의 아버지는 안 그래도 좋아하는 술을 중독을 넘어서는 단계까지 부어라 마셔라를 하는 통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아내 뒤를 따랐다. 그로 인해 세란은 어린 시절을 부모 없는 천애고아신세가 되었다. 뜻하지 않게 기구한 인생을 걸어오면서 자연스레 자립심이 생기게 되었고 남 탓이나 응석둥이 기질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 세란에게 있어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였고 그 끔찍한 삶이 되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세란은 자신이 계획한 인생 경로는 평생 직작생활을 하며 자녀를 낳고 탄탄하게 노후준비를 하며 인생의 황혼기를 즐기는 것을 인생 최대 목표로 삼았었지만 인생은 뜻하지 않게 펼쳐질 목전에 자신이 서있다는 사실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세란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질끈 감쌌다. 그리고 갑자가 항상 속으로 모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남편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는 뒷일은 생각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내뱉었다.
"괜찮아 내가 먹여 살릴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숱한 고비는 있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돈걱정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밖에서 두 자녀들이 눈을 가지고 즐거이 노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값진 보상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정민과 혜민 그리고 둘의 보디가드 깜순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저녁까지 실컷 놀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밖에 조금은 괴상하게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쓸쓸히 내버려두고 잽싸게 집안으로 들어왔다. 음식을 집어먹으려는 아이들에게 세란은 조금의 가능성도 주지 않고 빨리 씻고 나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그 시간 준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벌전을 리플레이로 보고 있었다. 그날은 새벽에 7:0 스코어로 리버풀이 역사적인 압도적 승리를 가져갔다고 하루 종일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아 있었다. 식사시간은 여느 가정보다 더욱 세란에게 중요한 시간이었고 가족에 대한 허기가 다른 사람보다 클 수밖에 없기에 가족이라는 의미에 식사가 가지고 있는 상징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티브이와 핸드폰등은 식사시간에 절대 만질 수 없는 금기였다. 그렇게 그들은 여느 화목한 가정처럼 옹기종기 모여 웃음꽃을 피우다가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다 마치고 후식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민과 혜민은 반드시 봐야 하는 만화가 있다며 아우성을 쳐대서 세란은 둘에게 방에 들어가서 보라고 말했다. 과일은 만화를 보고 있으면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그때 정민이 자기가 직접 사과를 깎아먹겠다고 고집을 부려댔다. 세란은 워낙 덤벙대는 성격의 정민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호하게 정민의 요구를 거절했다. 정민은 잠잠히 엄마의 말을 듣고 방에 들어가 세란과 함께 만화를 보고 있었다. 세란은 쟁반에 과일과 과도를 올려놓고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 전에 좀전부터 참아온 소변을 보기위해 화장실에 뛰어갔다.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 이었다. 거사를 치르고 손을 씻고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있는 과도가 사라져 있었다. 세란은 불현듯 뇌리에 사과를 직접 깎아 먹겠다는 정민의 말이 떠올랐다.
"여보 여기있는 과일 어디있어"
"막둥이가 가져갔어 자기가 깎는닫고"
그때 때마침 방안에서는 정민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세란과 정민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곧바로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울고 있는 정민의 손에는 피가 묻은 칼이 들려있었고 혜민은 목에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오며 쓰러져 있었다.
정민은 그날도 여지없이 야간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물건이 많이 들어오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 몸이 고되지도 않았고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그 시간에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손님이 없는 시간대를 틈타서 독서를 했다. 어느 일에나 프로다운 모습을 보인다면 어디서나 성공한다는 하나의 성공법칙이 정민에게는 딱히 달갑지고 않았고 그리고 그러 종류의 성공과 자기 계발도 그닥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정민에게는 숨이 붙어 있기에 사는 것이고 누나 혜민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 때문에 죽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그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호흡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어렸을 때의 그 어리둥절할 만큼 끔찍한 사고는 정민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그 끔찍한 기억은 어린 정민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의학적 상식으로 헤리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축복은 정민에게 영원한 선물로 주어지지 않았다. 정확한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정민은 항상 특정한 날이면 부모님은 자신을 두고는 1박 2일로 납골당을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의 납골을 모시는 거냐고 물어보면 준식과 세란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아는 지인'.
정민은 그 이상의 질문은 실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는 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를 틈타서 친구들을 불러 게임을 하거나, 축구경기를 보거나 비상금을 털어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음식을 무자비하게 시켜 나름의 파티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진부하게도 하늘에서는 주인공이 연극무대 위에 서기전 어둠이 드리우듯이 하늘은 우중충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웠다. 부모님이 납골당을 가기 전날이었다.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치르는 날이라 빨리 끝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분명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의무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고 모종의 제약기 걸린듯한 느낌이라는 걸 정민을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봐왔고 느껴왔던 터였다. 준식과 세란은 자신의 학교성적이라던가 어울리는 친구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 자신 또한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불현듯 왜 부모님은 자신에게 관심을 주면서도 겁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특히 친척들이나 부모님의 지인들과는 절대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런 부분에서는 과한 집착을 보였고 정민은 그렇게 라도 부모의 관심을 갈구해서 일부러 친척들과 지인들을 만나러 가는 나름의 일탈을 보일 때도 있었다. 좌우지간 시험이 끝나 학교를 파하고 친구들이 pc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자고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시험종이를 들고 복기하고, 수정하는 시간을 위해 집을 일찍 들어가기고 마음먹었다. 문 앞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문을 열기 전부터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분명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였다. 정민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방해될까 봐 꼿발을 디디며 언성 높은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혜민이가 참 서운하겠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렇게 매몰차니까. 벌써 시간 지났다고 당신 자식 잊어버린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말했잖아. 지급 갑자기 물량이 터져서 가봐야 한다고. 나라고 가고 싶어서 그래? 내가 대표인데 어떻게 해 때려치울까? 어? 나도 아빠야 당신만 부모냐고 이번 일 마무리되는 대로 따로 찾아갈게 미안해 정말로. 이번만 이해해 줘"
정민은 혜민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증이 증폭하고 있었다. 대화 중간에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혜민이라는 자신을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의 존재를 물으려다가 우선 계속해서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혜민이 말을 이었다
"아니야. 당신이 안 가니까 정민이라도 가야겠네" 그때 갑자기 방쪾에서 짝소리가 났다. 분명 이건 누군가의 손이 사정없이 누군가의 뺨을 내리칠 때의 소리였다. 정민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내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리고 모종의 거리감이 둘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정민에게도 좋은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을 댔다. 정민은 여자에게 손을 대는 남자를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자신의 아버지가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때 철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세란의 설움에 받쳐 우는 소리가 신발장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준식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과 회사의 대표로서의 의무감을 감당해야 했기에 지금 이순간이 혼란스러웠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포효하듯이 악을 지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민은 그 소리를 듣고 곧바로 화장실 안으로 숨어 들어갔고 준식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세란의 울음이 어느 정도 그치는 소리를 듣고 화장실에서 나와 현관문을 살며시 열고 밖으로
향했다. 정민은 매우 혼라스러웠다. 여러 가지 복잡한 추측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럴듯한 추측을 붙잡아 불안함 마음을 잠재우고 싶었지만 좀처럼 달뜬마음을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민은 혜민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아빠는 도대체 왜 자신과 납골당을 가라는 엄마의 뺨을 때렸을까 하는 질문들이 머리를 채웠다. 퍼즐들이 맞춰지기는커녕 사방으로 흩어졌고 조각들은 하나둘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별안간 정민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반항심이 들었고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고 싶은 마음이 그를 동요했다. 다행히 지갑에는 평소 등교할 때 지갑에 두둑이 챙겨주는 세란과 또 차에서 용돈으로 쓰라며 따로 주신 준식의 용돈으로 일주일 이상을 버틸 돈이 있었다. 정민은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주변 분식집에서 밥을 먹고 정처 없이 거리를 활보했다. 그다음 찜질방에서 잠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