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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이유

말하지 않아도 알아

by 서담


한여름의 무더위가 조금씩 가라앉아 저녁이 찾아올 무렵, "벚아"와 "은비"는 숲 가장자리에서 나란히 서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오간 뒤라 그런지, 두 나무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용히 되새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나무들 사이를 맴돌았지만, 그들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이렇게 사람들 없는 고요한 저녁뿐이었다.


벚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은비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봄이면 나에게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젠 여름이니까 꽃잎이 다 떨어져 버려서 다들 그냥 지나쳐 가더라.”


은비는 벚아의 이야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래. 봄과 가을에만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곤 해. 황금빛 잎이 생기면 나를 바라보지만, 그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사람들은 다시 나를 잊어버리더라.” 은비의 목소리에는 묘한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벚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은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런데, 그중에는 나를 항상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어. 매년 같은 시기에 찾아와 내 꽃을 바라보며 웃던 사람 말이야. 난 그 사람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어.”


은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나도 종종 보던 사람이 있어. 가을이면 내 잎이 황금색으로 물들 때마다 찾아와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고는 아쉽다는 듯 떠나곤 하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내 잎을 바라보는지 나도 늘 궁금했어. 하지만 우린 말을 할 수 없으니,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벚아와 은비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과 아쉬움, 그리고 그들과 나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마음을 서로 공유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무라는 존재로서, 사람들의 삶에 슬며시 스며들고 있지만 직접 다가가 묻지 못하는 자신들의 한계를 깨달으며 묘한 공감을 나누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은비의 주변을 지나가며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은비의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서로에게 말했다.


“이 은행나무, 가을이면 진짜 예뻐지지. 우리 그때 다시 와서 구경하자.”


이 말을 들은 은비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시 찾아올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벚아는 그런 은비의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비야, 사람들은 늘 나를 보고도 쉽게 지나쳐가지만, 가끔씩 그들이 진짜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까? 나는 정말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고 믿어도 될까?”


은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마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 있어 줌으로써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이렇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겠지. 그들이 우리를 쉽게 잊어버려도 말이야.”


벚아는 은비의 말을 들으며 그 속에 담긴 묘한 위로를 느꼈다. 자신들이 사람들에게서 쉽게 잊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언제든 돌아와 만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녁 무렵이 지나고 하늘이 점차 어둑해졌다. 벚아는 은비에게 조용히 다가가며 더 나아가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은비야, 혹시 너는 우리 나무들이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있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니?” 벚아는 희미한 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이듯 물었다.


은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지금도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해. 그들은 우리를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느끼고, 그 속에서 위로와 기쁨을 찾잖아. 비록 소리로 전할 순 없지만, 우리 나무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대화가 아닐까?”


벚아는 은비의 대답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자신이 피우는 꽃, 은비가 만드는 그늘과 황금빛 잎사귀 모두가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그동안 느껴왔던 고독이 한결 덜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밤이 점점 깊어가는 숲 속에서,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이미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무들 사이에 피어나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나눴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 여름밤을 더욱 평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벚아와 은비는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했던 비밀을 서로 공유하며 자신들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다음 계절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묵묵히 다가갈 수 있는 이유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여름밤의 고요함 속에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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