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완수의 의미
1995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45주년이던 그날, 나는 아내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TV에서는 “휴전선은 이상 없다”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GOP 철책선 위를 오가는 경계병들의 모습,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긴장된 시선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나로서는 그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 깊이 와닿았다.
그 평온함을 깨트린 건 부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부대 상황 발생했습니다. 즉시 복귀하십시오.”
순간,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짧았지만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탈영입니다. 소대장님 소대원입니다.”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내가 직접 맡고, 매일같이 면담을 하던 소대원이었다. 보호관심병사로 분류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제도 면담을 마쳤다. 어제까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아내는 내 표정이 굳어가는 걸 보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다녀와. 걱정하지 말고...” 하지만 전투화를 신고 끈을 매는 내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부대에 도착하니 이미 헌병 수사관이 와 있었다.
그들의 질문은 날카롭고 빠르게 이어졌다.
“마지막 면담 내용은 뭔가요?”
“최근 이상 징후는 없었나요?”
“다른 날과 어제 행동에 차이는 없었나요?”
내 면담 기록부, 장교 수첩, 병사 수양록까지 모두 회수되었다. 내가 기록한 모든 문장이 이제는 조사 자료가 되었다. 다음 날까지 보충 조사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그러나 나는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부대를 지켜야 했고,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답답했던 건, 그 병사가 왜 탈영을 결심했는지, 내가 놓친 사소한 신호는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리더로서의 책임이 목을 조였다. 그 병사는 평소 가정형편이 어려웠고, 복무 적응도 힘들어했다. 그래서 더 자주 대화하고, 고민을 나누었지만… 그게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탈영 인지 4시간 후, 첫 소식이 도착했다. 포항까지 택시를 타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황당함, 안도, 그리고 씁쓸함.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48시간 안에 복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헌병 사복체포조에 붙잡혀 돌아왔다. 군사재판 없이 영창과 타 부대 전출이 결정됐다.
사건이 정리된 뒤, 여단장은 대대 간부들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하셨다. 나 역시도 참석을 했다. 정신교육 도중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황소위, 기록이 훌륭해. 소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한 거야. 매일 면담한 내용이 명확하게 남아있어 수사에도 도움이 됐어. 잘했다."
"여러분도 맡은 직책에서 황소위처럼만 한다면 전혀 문제없을 거야"
그 덕분에 나는 무사히, 그리고 예정대로 7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칭찬을 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결국 OOO 일병을 무사히 전역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씁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리더십은 ‘위기 대처 능력’만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내는 힘’ 임을, 그때 처음 깊이 깨달았다.
“사람을 잃는 순간, 임무의 완수는 의미를 잃는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병사든, 어떤 부하든 마지막 날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진급의 기쁨 뒤에는 늘 그 일병의 빈자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