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대신 문장을 지휘한다
군 시절의 하루는 늘 ‘임무’로 시작해 ‘보고’로 끝났다. 작전계획을 세우고, 상황일지를 기록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총을 든 군인의 하루는 언제나 치열했다. 땀으로 젖은 전투복,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철책, 그리고 ‘승리’라는 단 하나의 목표. 그 속에서 나는 ‘잘 싸우기 위해’, ‘이기기 위해’, 그리고 ‘조직을 위해’ 살았다. 그때의 나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였다.
총을 들면 마음이 달라졌다. 몸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사고의 방향이 바뀌었다. 생각보다 ‘느낌’이 중요하지 않았고, 감정보다 ‘결과’가 우선이었다. 전쟁은 감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겨야 했고, 살아야 했고, 지켜야 했다. 그게 군인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전부’가 어느 날 낯설게 다가온 순간이 있었다. 작전계획을 수립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내가 써 내려가던 문장 속에는 늘 명령, 결과, 보고, 승인.. 이 네 단어가 전부였다. 그런데 문득, 한 줄을 마침표로 끝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그 질문이 내게는 총보다 무거웠다.
군대는 조직의 완벽을 위해 개인의 감정을 지운다. 지워야 했다. 명령 앞에서 감정은 사치였고, 판단보다 신념이 먼저였다. 하지만 인간이 감정을 버리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군복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이었고, 그 사람 안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보고서를 쓰면서도, 문서의 여백에 자꾸 내 마음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훈련일지를 쓰면서도, 병사 한 명의 땀방울에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의 두려움, 사투, 그리고 웃음까지. 전장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나는 몰래 기록했다. 그 기록들이 쌓여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로 남았다.
“총은 조직을 위한 것이지만, 펜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젠 총 대신 펜을 든다. 적을 겨누던 손끝으로, 종이 위에 나를 겨눈다. 적을 이기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한 문장을 쓴다. 총은 명령을 따르게 하지만, 펜은 질문하게 한다.
‘나는 왜 싸웠는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그리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총을 들던 시절엔 ‘방향’을 주어졌고, 펜을 든 지금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총은 나를 단련시켰고, 펜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총은 조직의 일부로 살게 했고, 펜은 인간으로 다시 서게 했다.
나는 군복을 벗었지만, 여전히 군인이다. 다만, 전장은 바뀌었다. 이젠 마음의 전장, 기억의 전장, 그리고 시대의 전장에서 싸운다. 이 싸움은 더 치열하다. 왜냐면 총알보다 생각이 더 빠르고, 명령보다 양심이 더 무겁기 때문이다.
때때로 군 시절의 습관이 펜 끝에 배어 나온다. 문장을 정리하듯 단어를 점검하고, 생각을 배열하듯 논리를 세운다. 군대에서 배운 질서와 절제는 내 글쓰기의 기초가 되었다. 어쩌면 군대는 나를 ‘훈련된 작가’로 만든 셈이다.
이제 나는 작전을 세우듯 글을 쓴다. 글에는 목표가 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하는 것. 한때 ‘전우’를 지휘하던 내가, 지금은 ‘문장’을 지휘한다. 총알은 관통하지만, 문장은 남는다. 그 남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면, 그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승리 아닐까.
이제 나는 훈련 대신 기록을, 명령 대신 사색을, 작전 대신 성찰을 수행한다. 삶의 모든 순간이 또 하나의 ‘작전명’이 되고, 그 결과는 책으로, 글로, 그리고 나의 이야기로 남는다.
“총은 명령을 따르게 하지만, 펜은 진실을 말하게 한다.” 나는 그 진실을 쓰고 싶다. 그게 내가 전역 후에도 여전히 군인처럼 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