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픈 죽음
부고 소식은 늘 예고 없이 온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짧은 문장 몇 줄이 사람 마음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동기의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소식”이라는 말이 이런 순간에 쓰이는 것일까. 보고 싶지 않았고,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궁금해하지 말아야 했지만 결국 마음이 먼저 반응해 버린 그런 저녁이었다.
삶은 간혹,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훌쩍 넘겨버린다. 특히 누군가에게 ‘아들’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더 그렇다. 자식은 부모에게 시간의 흐름을 확인시키는 존재이자, 내일이 존재할 이유를 증명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하루아침에 ‘부고(訃告)’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어떤 위로의 말도 참 어설프고 공허해진다.
그 어떤 말이 그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떠한 위로도 감히 건넬 용기가 없다.
며칠 동안 마음 한구석에 차갑고 둔한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 손으로 쥐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돌, 마음속 어딘가에 굴러다니다 밟히면 갑자기 통증을 일으키는 돌. 그 돌을 치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슬픔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성한 아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상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약하고 모자라기만 하다. 인생은 때로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잔혹한 풍경을 펼쳐놓는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을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비정상적 상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상실 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회복이 가장 더디며, 마음에 남는 생채기가 가장 깊은 상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시간으로도 해결되기 어려운 슬픔.
그 사실을 알기에 더더욱 말문이 막힌다. 친구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 어떤 말도 사실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또 말을 건네야 하는 존재다. 그 말이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홀로 두지 않기 위해서.
"가장 슬픈 죽음은 우리 안의 일부를 함께 데려가는 죽음이다."는 말처럼..
부모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일은, 바로 그런 종류의 죽음일 것이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세계가 산산이 흩어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결이, 햇빛의 온도가, 바람의 소리가 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 무게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기도할 뿐이다. 부디 그 친구가, 아들의 부재가 남긴 깊은 흉터 속에서도 다시 삶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떼는 날이 오기를.
며칠 동안 깊게 잠에 들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이런 슬픔과 맞서고 있는지 생각하면 세상은 가끔 너무 잔인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잔인함 속에서도 서로를 붙들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슬픔 앞에서 무너지고, 누군가는 슬픔 옆에서 조용히 등을 내민다.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주는 것,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조금씩 버틴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건, 사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부르며 산다. 친구를 돕고, 부르면 달려가고, 한마디 말도 못 하지만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체온을 나눠준다.
나는 여전히 생각 중이다.
“이 슬픔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이 옳은 위로일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맞는 걸까.”
답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느낀 것이 있다. 그 어떤 언어도 이 슬픔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떤 마음도 이 상실을 완전히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 그래도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조심스럽게 한 문장씩 쓰며, 누군가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