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을 위한 나의 공간
2023년 6월 6일, 드디어 이사를 했다.
이 단독주택을 매입한 날로부터 2년 하고도 4개월이 더 지났고, 기존에 살던 세입자가 나간 후,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시작한 지는 꼬박 10달이 지났다. 주변에서 그 집이 실존하는 게 맞는지부터 다시 의심을 받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렸고, 그 과정과 지금의 결과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정리하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써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많은 선택과 결정, 후회와 아쉬움, 사람들과 돈, 깨달음과 배움이 있었다.
스물다섯부터 사업을 시작했던 나에게 집이란 '잠시 잠을 자는 곳' 정도의 의미를 가졌다. 늘 그랬기에 첫 학동역 빌라 원룸 때도, 신논현역 오피스텔 원룸 때도 최우선순위는 회사와의 거리였다. 둘 다 5분 거리. 처음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집은 성수동 트리마제로 이사였다. 여전히 회사까지 차로 5분 거리였지만 조건이 많이 달랐다. 42층 한강뷰에 38평 쓰리룸 아파트였다. 아침이면 커뮤니티센터에서 조식을 주고, 몇 걸음만 걸으면 한강 산책이 가능한 그런 집이었다. 월세였지만 신축아파트에 내가 첫 입주를 한 새 집이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꽤 버거운 수준의 월세였다. 하지만 이내 성수동을 대표하는 아파트로 유명세를 타면서 주변으로부터 받는 관심과 비싼 값을 해야 하는 아파트가 주는 여러 편리함들로 지낼만했다.
그렇게 2년 월세 계약을 지내던 중에 회사를 매각했다. 매각 후에도 성수동 사옥에서 계속 일하기로 했기에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전세로 계약을 바꿔 2년을 연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파트가 내게 주고 있는 관심과 편리함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돈과 시간이 충분했지만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집, 사람들이 좋아하는 차,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었다. 종속되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나를 알기 위해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나에게 물어야 하는 때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술자리에, 유튜브에, 인스타 속에 숨어 그 질문들을 뒤로 미뤘다. 이 성수동 집은 그것들 속에 내가 숨어버리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환경이었다. 게으르고 의지가 부족한 나는 환경을 바꿔야 함을 차라리 선택했다. 그렇게 2021년 1월이 되자마자 판교에 집을 알아보기 위해 나섰다.
먼저 그동안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며 다녔던 집을 매입해야겠다고 정했다. 트리마제에서 지냈던 그 3년 6개월 동안 나는 가장 다이나믹한 부동산 시장을 경험했다. 내가 첫 입주를 했던 2017년 10월에는 트리마제마저 미분양이 많았고, 내가 트리마제에서 나온 2021년 4월은 부동산이 폭등해서 티비나 유튜브는 틀면 부동산 이야기뿐이었다. 회사를 매각하고 현금이 있었던 나에게 그런 소식들이 아무렇지 않았는 건 거짓말일테다. 왜 그때 그 집을 매입하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더 오를 수도 있으니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 하나. 아니 그러다 혹시라도 다시 집값이 떨어진다면? 점점 뉴스기사나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얻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집값의 등락과 상관없이 내가 살고 싶은 집을 매입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지금까지 이뤄낸 것들로 남은 삶을 그냥저냥 살아갈 마음도 없었다. 더 큰 것에, 더 먼 곳에 닿아보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한 어떤 크기의 도전에도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함을 알았기에, 만약 실패하더라도 재기를 노릴 공간을 원했다. 예산을 정하고 판교의 부동산을 찾아갔다. 먼저 타운하우스를 위주로 보여달라 했다. 아파트에 살고 싶진 않았고 단독주택에 지내기에는 관리를 해낼 자신이 없었던 이유였다. 한적하기도 하고 이쁜 집들이 많았다. 그렇게 투어를 돌다 부동산 실장님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과 너무 잘 어울릴만한 단독주택이 하나 있는데요.. 예산보다 6-7억은 더 들어서...' 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그냥 흔히 하는 영업이겠거니 하면서 들러나 보자고 했다. 단독주택 단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실장님은 판교에서 꽤 많은 단독주택들을 직접 지은 건축가가 본인의 집으로 만든 주택이라고 했다. 주택 단지로 들어서니 땅 70평-90평 사이의 대지에 각양각색의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치 땅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각오하라고 집주인이 시켜서 지은 집들마냥 그 대지를 꽉꽉 채워서 최고층수 제한인 3층까지 올린 모습은 모두가 같았다.
실장님이 '이 집이에요'라고 말하며 내려서 처음 마주한 그 집은 집 크기만큼의 정원이 있었다. 그마저도 집을 단층으로 지었고, 후에 2층도 반만 올렸다고 했다. 판교에서 유일한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모두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구조 일색인 이 주택단지 내에서, 이 집만이 자기만의 고유함을 내뿜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내 집이구나 싶었다. 아니 내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장님께 내부도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현재는 집주인이 아닌 세입자가 지내는데 너무 많은 분들이 구경만 하고 그냥 가셔서 계약금을 내지 않는 한 내부는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이라 했다.
황당했지만 계약금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오천만 원이라고 했다. 그럼 계약금을 내고 내부를 봤는데 마음에 안 들면 계약금은 어찌 되냐니, 사라지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땅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써버리겠다는 철학과 그 강단, 외부 구조와 자재들이 주는 느낌, 게다가 판교에 집을 몇 십채 지어본 사람이 본인의 집으로 지은 집이라는 단서들로 이미 내 마음속 이 베팅의 성공 확률은 50%를 넘어섰다. 어영부영하다가 놓치고 싶지 않았다.
2021년 2월 6일, 계약금 오천만 원을 넣고 내부를 보았다.
다행히 구조는 나쁘지 않았다.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지만 인테리어를 해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보였다. 내부를 보고 나오자마자 실장님께 말씀드렸다.
여기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