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해와, 나의 날과, 조카의 200일.
내년의 송년회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해마다 해가 간다.
김훈 <연필로 쓰기> '해마다 해가 간다' 中
소설가 김훈은 송년회의 단상을 이토록 멋지게 표현했다. 감히 노년의 심정을 헤아리며 그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 해를 넘기는 소감을 써낸 그의 글은 중년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의 마음조차 뒤흔든다. 과연 달라도 다르구나, 라고 감탄하며 명문가의 문장을 몇 번이고 음미한다. 10글자도 채 되지 않는 그의 문장은 웬만한 이들의 1백, 1천 글자보다 깊고 수려하다.
김훈의 글을 읽은 덕에 나는 요즘 이렇게 느낀다. 해, 연(年) 단위의 시간 앞에서 밝힌 그의 소회에 비해 나의 하루하루 짧은 단상은 보잘것없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무리 이름 없는 글쟁이일지라도 그의 1/365 수준에는 이르기를 희망하며 날마다 날이 가는 느낌을 느낀다.
날마다 보낸 날들로 2019년의 남은 날이 모자란 십일월이다. 팔월, 구월, 시월... 2019년의 10월까지는 그래도 올해 더 분발하리란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11월을 맞이하면서부터는 다르다. 십,일월. 발음부터가 그전까지와는 달리 거칠어져서일 수도 있고, 추워진 날씨 탓도 있을 것이다. 완연한 연말 분위기로 다시 들뜨게 될 12월과는 또 다르다. 이를테면 11월이란, 돌이키기엔 늦고 마감하기엔 이른 그런 날을 날마다 보내야 하는 달이다.
지근거리에서 자라나는 걸 봐와서 그런지, 벌써 이렇게 컸나 싶다가도 한편으로 아직 돌이 안 됐구나 하며 안도한다. 최근 받은 건강검진에서 연은 같은 연령대 아가들 중에서 상위 4%에 들 정도의 발육을 자랑했다. 이렇게 건강한 아가의 2백 일은 아주 알찬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쯤에서 새삼스럽다. 연의 날과 나의 날은 과연 함께 보내온 나날이 맞는 것인가.
속절없이 흘러버린 나의 최근 200백 일을 떠올리며 다시 되뇐다. 실은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시간을 갖고도 갖지 못한 것들에만 신경 쓰느라 분주한 나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이런 나의 날들을 무럭무럭 자라온 조카 연의 날들과 비교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쯤에서 결국 나는 나를 위로한다. 비록 치열하지는 못했어도 뜨거운 날들이었다. 연탄재만큼은 아니겠지만 누구에게도 함부로 걷어차이며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조카의 평생이 이제 2백 일 즈음이라면, 나의 평생은 그보다 수십 배 많다. 이참에 살아온 날들을 헤아려 보니 1만 950일(=30년)을 넘긴 지 오래다. 대개는 최근의 2백 일보다 좋았거나, 더러는 힘겹기도 했던 징그러운 날들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근래의 2백 일만큼은 조카의 찬란한 생명력에 상당히 기대어 살았단 사실이다.
이러한 나보다 두 배는 더 살아 평생이 2만 몇 천일 즈음인 소설가 김훈을 끝으로 생각한다. 그의 문장도, 연륜도 한 때는 나와 같았거나 혹은 못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주제넘게 추측한다. 젊은 날의 김훈 또한 날이 날마다 가서 때론 좌절하고 때론 성공한 해를 해마다 보내지 않았을까. 그렇게 마침내 노년을 맞은 그이기에 그토록 담담하게 해마다 해가 가노라 쓸 수 있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또 적잖은 위로가 된다. 내게는 그래도 앞으로 보낼 날과 넘길 해가 꽤나 많이 남았단 말이다.
조카 연의 찬란한 200일을 다시 한번 축하하며, 빚을 갚는 마음으로 졸고를 아가에게 바친다. 나의 글은 1천 글자를 훌쩍 넘겼지만 김훈의 단 열 글자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연이 이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