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호의에만 호의로.
그 호의가 내게도 해당된다면 모를까, 나만 쏙 빠져 있거나 특정 대상만을 향한 호의를 느낄 때면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다. 친구가 나보다 다른 친구에게 유난히 잘 할 때, 내겐 인사조차 건성인 이가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친절할 때, 틈만 나면 국민을 모독하던 정치인이 아니나다를까 선거철이 되자 국민을 위한다며 나설 때... 내게는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옛 추억 하나가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같은 반 친구 희와 난 삐삐로 자주 연락하고 그러다 집 전화로 통화도 길게 하는 사이였다(시대가 시대였다). 그 무렵 난 몇 명의 여자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중이었고, 희는 그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친구 환(남자)이 내게 갑자기 연락을 했다. 희의 선물을 사러 같이 가자는 거였다.
처음엔 조금 의아했다. 나야 희와 특별히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환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학교에서 그녀에게 짖궂은 장난을 많이 했고, 그로 인해 둘은 투닥거리기 일쑤였다(희는 가끔 환에게 화도 냈다). 하지만 그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환조차 생일 선물을 주겠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가까운 팬시점으로 향했다.
환이 먼저 고른 선물은 인형 비스무리한 캐릭터 상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만 몇 천원 쯤이던가, 당시로서는 영화표와 팝콘을 사고도 남는 액수였으니 내가 보기엔 꽤 좋은 선물이었다. 질 수 없던 난 피씨방에서 쓸 생각이던 오천원 짜리를 마저 보태 비슷한 수준의 상품을 골라 샀다. 그 길로 우리는 근처에 사는 희의 집을 찾아가 각자의 선물을 건네줬다.
다음 날이었다. 난 학교에서 우리 사이의 어떤 변화를 감지했다. 희는 환이 시비를 걸어도 투정만 할 뿐 짜증을 내지 않았고, 환은 평소와 달리 헤헤거리며 수위를 낮추는 거였다. 그런 둘을 지켜보던 난 마침내 알게 됐다. 어젯밤 희는 환에게 선물 고마웠다며 삐삐를 남겼단 사실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내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고 기다린 그날 저녁에도 내 삐삐엔 희의 음성 메시지는커녕 091012(공부열심히)조차 뜨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였다. 환이 녀석의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였다. 이윽고 그는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어제부터 희와 사귀기로 했다고. 그제야 난 깨달았다. 희에게 친구의 선물은 당연했지만, 남자 친구의 선물은 특별했다는 것을. 그녀가 내게도 고맙단 메시지를 남겼더라면 덜 서운하긴 했을까. 그저 난 바보가 된 기분이었고, 그녀와 나 사이에 삐삐가 울리는 일도 더이상 없었다.
그때의 일은 내게 어떤 의미로 새겨졌을까.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다? 사전 작업보단 물밑 작업이다? 연애는 선택과 집중이다? 조금씩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나, 여기서 그런 얘길 하려던 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로부터의 선택적인 호의를 마주할 때면 위에 소개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정확히는 나 혼자 바보가 된 것 같던 그때의 기분이 쌉싸름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아마도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나는 경쟁적으로 누군가의 호의를 얻으려 한다거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댓가없는 호의를 쏟는 일에 신중한 편이다. 또 하나,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의 호의도, 특정 조건에서만 친절한 사람의 호의도 웬만해선 믿지 않게 되었다.
무조건적인 호의도, 선택적인 호의도 나는 참된 의미의 호의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나와 상대의 호의가 자연스레 오고 가는 그런 관계에 더 집중하고 싶다. 또한 타인을 향한 내 호의는 어떤 경우에도 선택적이지 않기를, 호의가 반드시 호의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음을 유념하며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