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트 약속
- 어디야?
텅 빈 집에서 소파에 기대어 있던 나는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침내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실 마음은 전부터 갖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몰라 기회를 보고 있었다. 약속이 없어 한가한 토요일 오후만큼 미뤘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 좋은 때도 없다. 그날이 내게 바로 그런 날이었다.
- 잠시 나와있어. 무슨 일이야?
예상보다 빠른 아내의 답장에 오히려 나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말을 골랐다. 막상 언제, 어떻게 만나서 이야기할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빠르게 응답이 왔는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따질 이유는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한 끝에 아내에게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밖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보낸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그녀에게 처음으로 했던 데이트 신청을 떠올렸다. 5년쯤 지난 일인데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과거였다. 그녀의 수줍었던 미소, 따뜻했던 손길이 갑자기 그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귀에서는 계속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마시는데 휴대폰 알람음이 울렸다.
- 그래, 어디서 볼까.
데이트의 설렘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흥을 느꼈다. 아내가 순순히 나의 제안에 응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반가움을 느낀 것이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아내와 갈 만한 식당을 생각해 냈다.
- 우리 자주 가던 역 근처 일식집 어때? 숙성회 맛있다고 좋아했잖아.
- 알겠어. 일곱 시쯤이면 되지?
- 응, 식당으로 바로 와. 거기서 보자.
일곱 시면 세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난 소파의 팔걸이에 걸치듯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한참 전에 읽다가 만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첫 장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책장을 덮어야 했다. 도무지 책 내용에 몰입을 할 수 없었다. 잡생각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활자보다 귀를 통해 쏟아지는 소음에 온통 신경이 쏠려서 조용한 독서가 불가능했다.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도 이명에는 변함이 없었다.
TV 옆 선반에 놓인 턴테이블에 레코드 한 장을 올렸다. 아내가 일요일 아침이면 종종 틀어놓던 클래식 앨범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볼륨을 크게 키우고 소파로 돌아와 비스듬히 누워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아내를 만나기까지는 두 시간 사십 분이 남아 있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온 집안에 퍼졌다. 디지털 기기로 음악을 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울림을 느끼며 귀 안의 소리를 잊으려 노력하기로 했다.
얕은 잠에 빠졌다 깨어나기를 두어 차례, 조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약속 장소로 향할 준비를 했다. 소파에 눕느라 바짝 눌린 머리에 물을 묻혀서 빗질을 하고, 결혼식에 다녀와 벗어 두었던 양복을 옷장에 집어넣고 후드티와 점퍼를 꺼냈다. 바지는 처음에 트레이닝복을 꺼냈다가 도로 넣고 짙은 색 청바지를 골라 입었다. 고급 일식집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너무 편안한 옷차림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나의 복장까지 지적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집을 나서면서는 그녀와 술 한 잔도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횟집을 고른 이유 중의 하나가 어떠한 저녁 식사보다 자연스러운 술자리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양식에 와인을 곁들이는 건 생각만 해도 목이 조여 오는 듯하고, 고깃집에서 소주를 마시기에는 우리 둘의 관계가 썩 가깝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연락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