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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이 Oct 18. 2022

누워 있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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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때때로 전화를 걸어 뭐 하느냐 묻는다. 애인도 없고, 밖에 나가는 것도 안 좋아하는 딸내미가 걱정되는 거겠지. 그때마다 내 대답은 똑같다. 그냥 있어. 귀찮아서 에둘러대는 대답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있는데, 사실 게을러 보일까 봐 숨겨둔 말을 꺼내보자면 이렇다.


그냥 (누워) 있어

그냥 (바람이 좋길래 창문 열고 누워) 있어

그냥 (고양이들이 옆에 누워) 있어

그냥 (햇볕에 누워 일광욕하고) 있어

그냥 (누워서 하늘 보고) 있어


어쩐지 그냥 있다는 말보다 더 한량 같아 보이는 말. 그냥 '누워' 있어.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사람들이 듣는다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이게 무슨 시간 낭비냐고 질타하겠지만, 혹시 누워 보셨는가? 그저 '누울 수 있는데 왜 앉아요?'하는 MBTI 해석 같은 말이 아니다(아, 물론 난 게을러서 잘 눕기도 하지만). 안 누워 보신 분들은 의심을 거두고 한 번만 누워 봤으면 좋겠다. 단, 이때 지켜야 할 규칙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맨바닥'에 눕는 것이다. 침대 안 되고, 소파도 안 된다. 두툼한 방석도 안 되고, 층간 소음 방지용 매트도 있어선 안 된다. 아주 얇은 러그 정도라면 괜찮다. 바닥에 털썩 누웠을 때 단단하고 딱딱한 바닥이 등과 빈틈없이 밀착되어야 한다.


우리 집엔 내가 눕는 몇 가지 명당이 있는데 바람의 길목, 햇볕이 내려앉는 곳, 등이 시원한 그늘과 누웠을 때 하늘이 시선에 걸리는 곳이다. 몇 곳을 정해두고 그때그때 기분 따라 날씨 따라 장소를 옮겨 눕는다. 말은 이렇게 거창해도 코딱지만 한 거실에서 베란다 문 앞을 50cm 단위로 옮겨 다니며 가로로 눕고, 세로로 눕는 것뿐이지만. 요즘처럼 온종일 창문을 열고 있어도 좋은 가을에 가장 애정 하는 장소는 바람의 길목이다.


지금부터 누워보자. 먼저 핸드폰을 멀리 두고 바닥에 눕는다. 애써 힘주어 세우고 있어야 했던 척추가 바닥 쪽으로 내려앉는 게 느껴진다. 힘을 주지 않아도 바닥이 지탱해 주는 안온한 느낌. 팔은 몸통 양옆으로 편안히 두고, 눈을 감는다. 자연스럽게 예민해진 청각에 귀를 기울이자.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가 파도 같다. 작은 새들의 지저귐, 때때로 아파트 주민들의 생활 소음과 배달음식을 나르는 오토바이 소리 등이 귓가를 지나간다. 낮은 숨을 쉰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할 낮은 숨.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다 보면 관자놀이에서 연기가 빠져나가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 일주일 동안 나를 괴롭혔던 업무들, 세 살짜리 마냥 생떼를 부리던 직장 상사의 억지, SNS 속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행복한 사람들, 다음 달을 버텨야 할 생활비 걱정, 구해지지 않는 일자리, 날 행복하게 하는 건 뭐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오래 할 수 있는 직업은 과연 무엇일까? 이대로라면 그냥 죽는 것도 좋겠어. 구질구질하고 나를 갉아먹던 상념들이 연기처럼 스스스 빠져나가 사라진다. 감은 눈덩이 위로 바람이 슬쩍 지나가고 반짝반짝 햇살도 어른거린다. 그렇게 머리가 무거워 저릿하던 뒤통수가 가벼워지면, 몸을 반으로 접어 모로 누워 창밖을 본다. 파란 하늘에 짙푸른 나뭇잎이 춤을 춘다.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단 10분. 또는 1시간. 그냥 누워 있는 건 나에게 학창 시절 쉬는 시간 10분의 단잠과 같다. 짧지만 강력하게 충천되는 시간. 상념이 가득한 내 머릿속이 비워질 때까지 시간을 들여 누워 있기도 한다. 그러다가 슬쩍 잠이 들어도 좋다. 괜히 죄책감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


나는 언제부터 그냥 누워 있는 걸 좋아하게 됐을까. 이유를 고민해 봤지만 특별한 계기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바닥에 철푸덕 누운 고양이가 부러워 누웠는데 그 느낌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지난날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해소됐던 태평한 기억들이 나를 그냥 눕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땐 잠을 자는 걸 '리셋'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머리의 퓨즈를 껐다가 다시 켜는 것 같은. 물론 현생에 찌든 3n 년 차 인생에는 잠을 자고 일어나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종종 스트레스성 불면증을 겪는다.


그냥 눕기를 하고 나면 일부러 더 큰 몸짓으로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다. 중력에 맞서 다시 기립근이 긴장되고 척추가 자리를 잡는다. 다시 내가 똑바로 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다만 저질 체력이라 남들보다는 더 종종 더 자주 더 오래 눕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또 이렇게 대답하겠다.


저요? 지금도 그냥 누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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