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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이 Oct 18. 2022

초록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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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좋다. 우리 동네는 구도심이라 오래된 나무가 많다. 걷다 보면 기둥이 굵은 나무들이 울창한 잎을 뽐내며 바람에 사부작거린다. 특히 동네 산책로 곳곳에는 나무 그늘 아래 그네 벤치가 있는데, 그곳에 앉아 고개를 젖히면 나뭇잎 사이로 햇살 별이 반짝인다. 순간 나는 푸른 언덕 위에 아름드리나무와 단둘이 된다. 고요하고, 마음이 놓인다. 광합성하는 식물처럼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것 같아. 어느 전생에 나는 식물이었을까?


특히 좋아하는 나무를 꼽자면, 물가에 머리를 담그고 서있는 긴 머리의 버드나무다. 봄이 찾아오는 시기이면 괜히 안달이 나서 3월 초부터 일주일에 한번 산책로를 드나든다. 그러다가 마침내 연약한 연둣빛 새싹이 나오면 빨리빨리 초록색이 되면 좋겠다! 발을 동동거린다. 버드나무는 짙녹음이 우직하고 조용하다. 왜인지 몰라도 내가 무슨 비밀을 털어놓아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나에게 꼭 '괜찮다' 말을 해주는 것 같다.


초록은 진실되다. 물이 적으면 시들고, 햇빛이 강하면 붉게 탄다. 때맞춰 물을 주고 바람 앞에 내놓으면 생에 주기에 맞춰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기둥에 살을 붙인다. 얼마 전 그 진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비가 잦아 물 주기를 게을리하던 8월, 애지중지하던 클리핑 로즈마리의 잎이 가늘게 말라버렸다. 놀란 마음에 서둘러 물을 주고 회복 불가능일 것 같은 가지를 숭덩숭덩 잘라냈다. 제발 살아다오. 기도하는 마음으로 며칠이 지나고, 신기하고 선물 같은 순간을 마주했다. 화분에서 클리핑 로즈마리의 작은 새싹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 하나였다가 다음 날은 다섯 개, 그다음에는 일곱 개가 되더니 지금은 16개의 새싹이 자라나고 있다. 봄부터 여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모르는 새 클리핑 로즈마리의 씨앗이 흙에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요즘에는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그 새싹들을 보며 위안을 받는다.


세상에 의미 없는 건 없다. 내가 물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물을 주었더라도 나뭇가지를 쳐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새싹을 틔우기엔 물이 부족했더라면 나는 흙에 씨앗이 떨어졌는지도 몰랐을 테고, 새싹이 맞이할 선물 같은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물을 말렸고 -> 가지를 쳐냈더니 -> 물이 잘 마르지 않았고 -> 젖은 흙에 씨앗이 불어 -> 새싹을 틔웠다


하루하루 버티기가 고된 지금의 지난한 시간들이 내가 희망을 잃었을 때 선물처럼 고개를 내밀어 줄 거란 걸 믿는다. 진실되고 희망차고 안심이 되는 초록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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