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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경험은 강력하다. 나는 산 아래 동네에서 자랐다. 그래서 여름이면 형제들과 뒷산 계곡물에서 큰 바위 미끄럼틀을 탔고, 추워지면 너른 바위에 누워 몸을 데웠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나게 굵고 큰 아카시아 나무가 꽃을 피우면 여름이었고, 흙냄새가 깊어지면 곧 비가 내렸다. 이 모든 걸 뛰어놀며 직접 경험하고 배웠다. 그래서인지 계절을 자꾸만 피부로 체감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시원하게 밀려드는 바람이 좋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가을. 찬바람에 오송송 일어난 고양이 털을 보며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린다. 오히려 보일러를 켜는 겨울보다 지금이 따뜻한 차를 마시기에 알맞은 계절이다. 차가 우려지는 동안 양말도 한 켤레 꺼내 신는다. 그렇지만 짧은 바지는 포기하지 않은 채로. 또 뜨거운 차에 얼음 두 알 넣는 걸 잊지 않은 채로.
나는 매사 밍숭맹숭한 게 좋은 사람이라 취향도 뭐든지 중간이 좋다. 극단적으로 덥지만 열정적인 여름과 함박눈과 크리스마스가 아름다운 겨울보다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봄과 살짝 더운 햇볕 아래서도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가을이 좋다. 그리고 봄과 가을 중에서 굳이 꼽으라면 가을.
가을에는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맘껏할 수 있다. 여름 내내 습기에 죽어가던 나를 바삭하게 한다. 해가 짧아지는 게 아쉽지만 집안 깊숙이 오렌지 석양을 내려주고, 온종일 선선한 바람으로 살랑살랑 맘을 즐겁게 한다. 초록이 하나둘 물들어 가는 것도 재밌고, 바람에 더이상 미련 없다는 듯 잎을 떨구는 담대함도 좋다. 차가워 바닥에 러그를 깔게하면서도 시원하기도 해 자꾸 바닥에 앉게 되기도 하고, 여름 내내 둘이 데면데면 지내던 고양이들이 서로 엉덩이를 붙이고 눕는 것도 너무 귀여워 미치겠다. 아직 덮고 자기는 더운 두꺼운 이불을 꺼내 한쪽 발을 꺼내놓고 자는 것도 좋다. 파랗고 청량한 하늘이 손에 닿을 수 없을만큼 높아지는 것도 마음에 든다.
흔히 가을을 두고 쓸쓸하다고 하지만 틀렸다.
가을은 청량하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다. 아름다움을 아는 로맨티스트고, 포근하지만 때때로 차가워 서로를 더 밀착하게 만든다. 다정하다. 바삭하고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