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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이 Oct 18. 2022

집이 좋아

[12/100] 도전 : 1일 1글쓰기 - 프로젝트 '좋아해'

나는 지독한 집순이다. 얼마만큼이나면 일주일은 물론이고 한달, 두달... 집에서 먹을 것과 즐길 것이 있다면 나가지 않아도 좋을만큼. 실제로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칩거 생활을 하고 있다. 부작용이라면 살이 찌고 근육이 빠진다는 점, 반면 사부작거리며 이것저것 소소한 도전을 이어가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많아진다는 의외의 생산적인 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집이 괴로울만큼 싫었던 적이 있다. 우연인지 내 친한 친구들은 거의 모두 20대에 결혼을 하며 각자의 가정으로 행복을 찾아 떠났다. 서른이 넘어서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프리랜서의 월세 생활, 내 자식처럼 길러온 고양이는 점차 늙어갔다. 바람만 불면 떨어질 것 같은 외줄에 서서 나는 거의 충동적으로 서울 월세를 접고, 경기도에 낡고 낡은 아파트를 샀다.


그런데 명의만 내 이름이고, 은행의 것인 그 집을 들어가고 나니 외줄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나는 종잇장처럼 얇은 살얼음판에 섰다. 한 발 잘못 딛으면 단숨에 폐를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물에 빠질 것 같았다. 퇴근해 집에 들어오면 습관처럼 맥주를 마셨고, 그러다가 거실에 앉아 펑펑 울었다. 어느 날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리를 질렀다.


그 무렵 운이 좋게도 고정 수입 외에 레귤러 알바를 할 수 있게 돼서 수입은 나쁘지 않았다. 빚을 빨리 갚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당장은 이 숨막히는 집에 정을 붙이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집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로 커튼을 하고, 가구를 들였다. 침대도 퀸 사이즈로 바꾸고 괜찮은 소파도 샀다. 그때는 의도보다는 무의식이 앞서 돈을 마구 써댔다. 구멍난 가슴을 채워주길 바라면서.


실제로 그것들은 나에게 지푸라기가 되어 주었다. 일을 하고 오면 집이 아늑했고, 햇볕 아래서 기지개를 켜며 뒹구는 고양이들을 보면 마음이 행복했다. 어느새 내 발아래서 날 위협하던 살얼음은 진창이 되었고, 바삭하게 말랐다.


많이 성장하게도 했다. 평생 무섭고 싫기까지 했던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다섯식구를 건사했을지 생각하면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단함을 어떻게 견뎠는지 안쓰러웠다.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됐고 더 사랑하게 됐다.


사람이 싫으면 뒷꿈치도 보기 싫다는 말을 실감하며, 낡은 아파트를 가재미 눈을 하고 훑으며 트집 잡던 나였는데, 이젠 샷시가 낡아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베란다에 대야를 가져다 놓는다. 군데군데 벗겨진 마룻바닥은 러그를 깔아 가리고, 벽에는 페인트를 발라 꾸민다. 현관에는 플라스틱 타일을 얹어 밝게 했다.


어쩌겠어. 지금 싫다고 한들, 금리도 점점 높아지고 아파트 값도 내려서 팔지도 못한다. 벚꽃이 나리던 4월말 갑자기 해고를 당해 빚에 빚을 얹으며 강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생 주옥같다 읊조리며 엉덩이 붙이고 있어야지. 덕분에 3n년 만에 운전면허를 따며 기능인이 되었잖은가. 정신승리 하는 법도 배운다.


월세 올려달라는 주인없고 이사 안 가도 되고 내 마음대로 벽을 노랗게 했다 하얗게 했다. 못을 쾅쾅 박아도 된다. 이곳에 와서 고양이도 안 아프기 시작했고, 좀 더럽게 써도 내 집이니까. 내가 숨어들 동굴이니까. 내 안식처니까. 충전소니까 애증의 마음으로 집을 좋아하기로 했다. 좋다, 집.


THE LOVE이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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