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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이 Oct 18. 2022

살짝 어두운 게 좋아

[17/100] 도전 : 1일 1글쓰기 - 프로젝트 '좋아해'

거실에 해가 길게 들어오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서남향인 우리 집은 여름에는 베란다까지 짧게 해가 들고 봄가을에는 거실 깊숙이까지, 겨울에는 찰나의 석양이 스치고 지나간다.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을의 오렌지 석양이 작렬하며 우리 집을 구경하고 나면 나는 커튼을 치고 노란색 테이블 조명을 켠다. 그리고 잠이 들기 전까지 이 조명에만 의지한 채로 저녁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하루가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과 소란스러운 것들이 경계를 늦추고 조용해지는 시간. 바깥은 네온사인이 들어오며 본격 시끌벅적한 세상이 되겠지만 우리 집만큼은 풀벌레 소리만 새시 너머로 들려올 뿐 고요하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밝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전구가 여러 개 달린 조명을 거실과 주방에 설치했다. 지난번 집의 형광등이 너무 어두우서 한풀이하는 심정으로다가. 그런데 주황색 조명의 안정감을 맛보고 나서 우리 집 거실 등은 손님이 오지 않고서야 켜지는 일이 없다. 밖은 어두운데 사위가 밝으면, 괜히 통 안에서 핀 조명을 받고 있는 햄스터가 된 기분이 든달까. 아무튼 마음이 불안정하다. 이렇기에 때때로 가족들이 집에서 자고 갈 때면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인다고 민원이 쇄도한다. 


추운 겨울날 성냥을 팔던 소녀가 창문 너머의 단란한 가족을 봤을 때, 우리나라처럼 하얀 LED 등이 켜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저기에 끼고 싶다는 마음보다 어쩐지 홈쇼핑 가족 시식단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주황색 조명은 따뜻한 솜이불 같다. 어두운 까만색도 차가운 하얀색도 주황색 조명 하나면 따뜻한 색으로 변한다. 혹시 마음의 위로가 필요하다면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주황색 조명의 힘을 빌려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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