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유쾌한 기분에서 나오고, 이 유쾌한 기분은 우리의 건강한 신체에서 나온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인생을 이루는 다양한 가치 중에서 '건강'만큼 중요한 게 없다. 돈, 권력, 행복, 친구보다 더 소중한 게 건강이다.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는 세상 그 무엇도 가치를 잃는다. 반대의 경우도 완벽하게 성립된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다양한 가치는 건강한 신체에서 비롯될 것이다. 불행히도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모든 걸 잃을 만큼의 건강이 위태로웠던 순간은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해야 할 삶이다. 그걸 미리 깨달았다면 스스로 불행한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매달렸었다. 월급은 적어도 일할 수 있는 직장은 있었다. 원치 않는 실직으로 백수가 돼도 아내 덕분에 네 식구가 굶지는 않았다. 매일 비슷한 업무를 반복해도 월급은 밀리지 않는 직장에도 다녔다. 1년 넘게 월급 못 받고 다닌 직장에 비교할 게 아니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얼마든 정신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나와 아내가 원해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딸을 낳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에는 책임이라는 의무가 따른다. 책임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중에는 아이를 건강하게 양육할 책임도 있다. 건강은 신체와 정신을 아우른다. 이를 소홀히 하면 부모로서 자격을 의심받는다. 한때는 의심받을 짓을 했었다. 내가 낳아놓고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어쭙잖은 권위로 내 입맛대로 휘둘렀다. 말로 상처 주며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잘못을 깨닫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일종의 정신병 초기 증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 만나는 게 불편했다. 오래 만나온 친구의 편안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 이유를 찾지도 만들지도 않았다. 고정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만남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는 걸로 단정 지었다. 고작 업무로 연결되는 관계가 전부였다. 같은 직장 동료도 직장을 떠나면서 단절되기 일쑤였다. 소극적인 태도 탓에 불편도 감수하고 손해에 따른 고통도 감내했다. 여럿이 있는 것보다 혼자 있기를 즐겼다. 도움이 필요한 때조차 도와달라는 말을 안 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혼자만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비교로 자신을 초라하게 했고, 책임 없는 행동으로 아이에게 위협적인 존재였고, 어울리지 못해 겉도는 직장인이었다. 몸에 질병이 있어야만 건강을 잃는 게 아니다. 생각이 올바르지 못해도 건강을 잃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살아보니 알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게 진정한 건강이라는 것을. 다행히 뒤늦게라도 알았고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중이다. 타인과 비교에 에너지 낭비 안 하고, 아이들과 동등해지려고 노력하고, 사람들 사이로 먼저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생각과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람 만나는 게 여전히 불편했다면 강의는 엄두도 못 냈을 테다. 강의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처음 한두 번 용기를 낸 덕분에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다. 어떤 자리가 주어지든 두려움에 피하는 일은 없다. 잘 하든 못 하든 일단 부딪치고 본다. 경험이 쌓일수록 사람 만나는 게 편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는 사람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걸 나눌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존재이다. 나 또한 그들로 인해 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강의 몇 번에 내가 180도 달라졌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강의를 비롯해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통해 내 안에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다. 그래야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건강은 좋은 음식을 먹고 꾸준히 운동하면서 만들 수 있다. 정신의 건강도 결국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강의를 하고 사람을 만나는 거다. 이를 통해 내가 정말 건강해진다면 행복도 따라올 것이고 유쾌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있을 테다. 유쾌해져 강의 또한 더 잘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