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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12. 2024

핑계 찾느니 그냥 쓰자

고척돔 근처에서 큰딸과 친구 세 명을 태운 게 10시 10분이었다. 친구들을 먼저 내려주고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게 11시였다. 큰딸을 시작으로 둘째가 샤워하고 나까지 씻고 나니 12시 반이었다. 그제야 침대에 누웠다. 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10여 분 뒤척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4시 반, 알람 소리에 깼다. 오만 생각이 들었다. 더 자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켰다. 덜 선명한 상태로 일기를 쓰고 필사도 했다. 6시, 집을 나섰다.


잠이 부족해 머리가 맑지 않다. 집중도 잘되지 않는다. 만사가 귀찮다. 자꾸 딴생각이 고개를 들이민다. '차에서 잘까?', '커피에 햄 치즈 토스트를 먹을까?', '넷플릭에서 <돌풍>4회를 시청할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이나 때릴까? 등등 글을 쓰지 않을 핑계를 찾았다. 


머릿속에서 두 놈이 치고받는 동안 몸은 민트 티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열고 글 쓸 준비를 마쳤다. 멍하니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떤 글을 써야 할지로 고민이 이어졌다. 결국 딴짓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문득 요즘 읽은 소설의 문체에 대해 생각했다. 구병모 작가의 <있을 법한 모든 것>은 다양한 단편을 엮은 소설이다. 소재는 둘째치고 작가의 문장력에 혀를 내둘렀다. 장문을 짜증 날 만큼 잘 쓴다. 긴 문장을 옮겨 적어봤다. 한글에서 10포인트로 7 줄이다. 중간에 쉼표가 있어도 숨이 찬다. 당연히 문장 구조는 완벽하다. 시시때때로 장문을 써서 한편으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론 이 또한 작가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훈 작가가 단문으로 속도감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각각의 계절>을 쓴 권여선 작가의 글에서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각각의 문장들이 촘촘하게 연결돼 어떤 오류나 허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성은 물론 표현에 이르기까지 빈틈이 없다. 레고 블록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완성품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단어들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긴 시간 고통 속에서 보냈을까?


최재천 교수는 기고문을 쓸 때 100번 이상 퇴고한다고 <최재천의 공부>에 적었다. 자신이 쓴 글에 어떤 오류나 허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고, 또 그렇게 쓰는 게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말이 100번이지 두세 번 고치는 것도 결코 만만한 과정은 아니다. 아마도 그런 노력 끝에 범접할 수 없는 필력을 갖게 된 거라고 나는 믿는다.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은 법이니까.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이들만큼 글을 잘 쓰지는 못할 것이다. 만에 하나 그들이 글쓰기를 멈춘다면 모를까 이번 생에서는 글렀다고 본다. 글쓰기 실력만큼은 세월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쓰면 쓸수록 글을 잘 쓰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에게 허락된 하나는 내가 그들만큼 경험이 쌓였을 때 그들과 비슷한 글을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다만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제 고작 7년 쓰고 성과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당연히 욕심도 없다. 주제 파악은 할 줄 안다.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잘 쓴 글을 꾸준히 읽고 잘 쓰려고 흉내 내는 것이다.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처럼, 잘 쓴 글을 따라 쓰다 보면 내 글도 좋아질 때가 온다. 내 글의 좋고 나쁨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 쓴 글과 비교여야 한다. 그게 정신 건강에도 이롭다.   


오늘도 이렇게 꾸역꾸역 겨우 글 한 편 써냈다. 머리는 여전히 띵하지만 뿌듯하다. 농땡이 부리지 않길 잘했다. 고만고만한 글이겠지만, 그래도 오늘도 썼다. 눈에 띄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는 분명 나아졌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믿어야 내일도 쓸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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