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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01. 2024

반찬을 만들어보니

살림은 아무리 해도 표가 안 난다고 말합니다. 출근한 아내 대신 하루 종일 집에 있어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다. 몸을 계속 움직여도 해야 할 일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할 일을 마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납니다. 그래서 어지럽히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라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사흘 동안 여행을 다녀온 터라 가뜩이나 할 일이 많았습니다. 엉덩이 붙일 새 없이 손과 발이 바쁜 하루였습니다. 그 덕분에 아내와 두 딸에게 감사했습니다.


여행 가기 전 냉장고 반찬을 정리했습니다. 계획이라도 한 듯 만들었던 반찬도 때를 같이해 다 먹었습니다. 신나게 놀고 돌아오니 당장 먹을 게 없습니다. 밥은 쌀만 씻으면 밥솥이 해줍니다. 반찬도 밥처럼 뚝딱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배달시키자니 여의치 않습니다. 아내는 온라인 수업, 큰딸은 학원, 작은딸은 태권도장에 갔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어느 타이밍에 시킬지 난감합니다. 이럴 땐 가장 만만한 게 라면입니다. 때를 달리해 큰딸은 짜파게티, 작은딸은 진라면(순한 맛)으로 때웁니다. 순순히 먹어 준 두 딸이 고마웠습니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나도 반찬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근해야 하는 아내는 마음이 편치 않은가 봅니다. 10시 넘어 일어난 두 딸은 아니나 다를까 배가 고프답니다. 또 라면을 끓여 먹일 수 없습니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를 그러모았습니다. 프랑크 소시지에 양파와 당근, 케첩과 굴소스로 양념해 볶아냅니다. 호박, 버섯, 양파를 한 입 크기로 썰고 장모님이 담근 된장을 풀어 찌개를 끓입니다. 거기에 김치, 연근장조림, 멸치볶음을 담아내니 그나마 한 상이 차려집니다. 군말 안 하고 먹어주는 두 딸이 고맙습니다.


배를 채운 두 딸은 자기들 방에서 놀며 공부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아점을 먹였으니 점심밥은 건너뛸 예정입니다. 그러니 곧 다가올 저녁밥을 준비해야 합니다. 냉장고를 채워야 합니다. 장을 보러 근처 마트로 갔습니다. 몇 개 담은 것 같지 않은데 10만 원이 넘습니다. 두 팔에 힘이 들어갈수록 며칠간은 입이 즐거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장바구니를 정리하고부터입니다. 비었던 냉장고에 재료를 채웠을 뿐 곧바로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은 씻고 다듬고 굽고 볶고 데쳐서 먹을 수 있는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큰딸은 진미채, 브로콜리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작은딸은 메추리알 장조림을 좋아합니다. 저는 어묵볶음을 즐겨 먹습니다. 퇴근한 아내는 대패삼겹살 숙주볶음에 맥주 한 캔 마시면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습니다. 사 온 재료를 정리하니 5시, 저녁밥을 먹고 학원에 가는 큰딸을 위해 늦어도 7시 전에는 모든 반찬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진미채를 시작으로 어묵볶음까지 만들고 나니 6시 반입니다. 그 사이 설거지를 세 번 했습니다. 그래도 반찬 네 통을 냉장고에 채웠습니다. 스스로를 칭찬했습니다. 


큰딸은 10시에 수업이 끝나서 학원 가기 전 저녁을 먹여 보냅니다. 7시쯤 단 둘이 마주 앉아 저녁밥을 먹었습니다. 반찬은 진미채, 브로콜리, 메추리알 장조림, 어묵볶음, 된장찌개, 김치, 김까지 차려냈습니다. 전날 짜파게티에 비할 게 아닙니다. 큰딸은 뭐든 차려주는 대로 잘 먹지만, 나름 한 입맛 하는 미식가 기질이 있습니다. 맛 감별이 날카롭습니다. 다행히 만들어낸 반찬이 다 입맛에 맞나 봅니다. 둘이서 진미채, 메추리알, 어묵볶음은 한 번 더 담아낼 만큼 맛깔스럽게 먹어치웠습니다. 반찬투정 안 하고 먹어준 큰딸이 고맙습니다.


9시가 다 돼 작은딸과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둘을 위해 대패삼겹살 숙주볶음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미리 만들어놓은 반찬도 함께 차려냈습니다. 운동에 진심인 둘째는 고기반찬을 좋아합니다. 아내는 차려주는 밥상이면 무조건 다 맛있다고 합니다. 마주 앉은 아내와 둘째가 만족해하는 밥상을 차려줬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해하며 즐겁게 먹는 모습에 저녁 내 애쓴 수고를 보상받았습니다. 다섯 번째 설거지를 마치니 그제야 저도 제 책상에 앉았습니다. TV앞에 두 딸과 아내가 둘러앉은 모습을 보니 괜히 흐뭇합니다.  


철이 들기 전에는 반찬 투정을 했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반찬 투정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가끔 어제처럼 싱크대 앞에 붙들려 반찬 한 두 가지 만들어내면 허리도 다리도 아픕니다. 어쩌다 한 번인데 말이죠. 세 아들 키우며 그 세월 어떻게 버텨내셨을까요? 어제 두 딸과 아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피곤을 잊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당신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신 성에 차지 않을 밥상이었겠지만 맛있게 먹어주는 세 아들을 보며 수고를 잊었을 겁니다. 싱크대도 없는 주방에서 손이 마를 새 없었지만 신나게 먹는 세 아들 보며 다시 힘을 냈을 겁니다. 그 덕분에 저도 이만큼 자랐고요. 그러니 이 아침 어머니의 수고와 희생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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