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대하여
마상. 마음의 상처를 일컫는 꽤나 오래된 신조어다. 많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마상'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곤 한다. 반은 농담 섞인 말이겠지만, 흔히들 사용하는 말인걸 보면 우리 인간들은 그만큼 상처 받기 쉬운 동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렇다. 최근의 나는 매일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일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안을 잠자코 들여다보면 일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나를 바쁘게 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이다.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수십 통씩 주고받는 이메일 속에서,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정받고 성취하고 싶은 욕구 속에서 내 마음은 하루에도 수차례씩 긁히고 멍든다. 이 과정에서 내 마음은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수비 대형을 갖추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피해 다니기 바쁘다. 그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나는 종종 너덜너덜해진 종잇장 같다.
아, 오해는 금물이다.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가 봐도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노골적인 상황이라면 상처는 아프긴 해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나는, 그간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나름 만족스러운 직장에서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조금씩 멍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서 그렇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들 모두는 매일 상처 받으며 살아간다. 스스로 상처를 자각하고 있는지, 얼마나 더 아프게 느끼는지만 다를 뿐. 대체 마음이라는 건 왜 이리도 여리고 부서지기 쉬운 것일까? 사람은 왜 어쩔 수 없이 상처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걸까?
사랑받고 싶어서.
내 안을 곰곰이 들여다본 결과 내 결론은 이렇다. 결국 내가, 우리가 상처 받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어서다. '사랑받고 싶어서' 우리 모두는 매일 조금이라도 상처 받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을 때 마음에는 멍이 든다. 사랑받는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처 받는 일은 너무나 쉽다. 내가 한 말에 누군가 공감하지 않을 때,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 내 기대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사람들이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을 때 등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은 누군가의 의도가 있든 없든 하루에도 수 차례씩,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용기 내어 동료에게 건넨 목례가 씹히면, 다음에 다시 목례를 하기는 여러모로 힘들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이런저런 조금의 신호로도 마음에는 괜한 불안과 불신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고, 마음에 상처를 얻고 매일을 살아가게 된다. 이쯤 되니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다.
왜 꼭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까?
너무 어리석은 질문인가 싶기도 하다. 세상에 미움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이는 비단 감정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당연한 말이다. 사랑을 받는 개체여야 더 좋은 유전자와 결합하여 대대로 경쟁력 있는 후손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그저 무리한 개인의 욕심으로 치부하기엔 거부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까우니 사랑받고 싶은 마음 자체에 상처의 책임을 돌릴 순 없을 것 같다. 그건 좀 가혹하다. 다만 화살을 돌리고 싶은 대상은 ‘사랑을 주는 대상’이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세상에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아마도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즉,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마음에 생채기는 더 쉽게 생긴다. 확률적으로도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난 상처에 대한 처방은 간단하다.
사랑받고 싶은 대상을 줄이는 것
즉,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기는 정말 힘들다. 이렇게 하려면 제각각 다른 상대방의 입맛에 따라 나를 맞춰야 하는데, 그 자체가 힘들뿐더러 이런 걸 꽤나 잘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대중의 사랑이 일의 필요조건인 연예인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의 사랑을 원할 필요가 없다. 특히나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이해관계로 인해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나를 꼭 사랑해줘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에게는 그저 ‘내 일에 대한 인정과 신뢰’를 얻으면 된다. 물론 이게 그렇게 무 자르듯 쉽지는 않다. 일로 만난 사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감정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의견이 부딪치거나 갈등이 생길 때면 왜 나를 알아주지 않나 싶은 인간적인 고뇌가 엄습한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나’와 ‘일’을 분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부정적인 피드백이 있더라도 이는 ‘일’에 대한 평가일 뿐 나라는 존재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설사 내 존재에 대한 공격이라 느껴질지라도 명심하자. 나는 그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고, 지금이 바로 ‘신경 끄기의 기술’이 들어가야 할 시점이라는 걸.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게 사랑받는 게 중요할까?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있다. 사랑받고픈 대상을 줄여보는 김에 가장 중요한 한 사람만 남겨보자. 모진 세상살이 속 마음의 상처를 줄이기 위해 나를 사랑해줘야 할 딱 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사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딱 한 사람은 바로 ‘나’이다.
나의 존재 가치를 가장 많이 인정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주변 사람들의 말과 표정에 휘둘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며 사는 것은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다른 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다른 글 ‘자존심, 자존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지도, 그래서 쉽게 상처 받지도 않는다. 뭣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될 확률이 크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외부의 어떤 공격에도 생채기가 생기지 않을 면역력을 이미 갖고 있음에도, 달라고 하지도 않은 다른 이들의 사랑까지 덤으로 얻으니 ‘마상’은 파고들 틈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맘 속에 알 수 없는 스크래치가 생긴다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1단계 처방은 바로 스스로 나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 아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이는 상처 난 자리에 바로 발라주어야 할 연고와 같다. 연고를 발랐다면,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낸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받을 필요는 1도 없다는 것, 따라서 그들이 나에게 상처를 줄 권리도 명분도 자격도 없다는 점을 떠올리며 무심하고 시크한 반창고를 덮어주자. 새살이 돋아난 자리에 다시는 상처가 자리할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