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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17. 2020

네가 말하는 너도, 내가 알던 너는 아니더라.

        우리 업계에서 작가 구인은 주로 알음알음으로 채워진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 프로그램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보통은 6개월 이내. 길면 1년 정도. 하나에서 열까지 설명하면서 호흡을 맞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계속 ‘아는 사람’만 찾게 된다. 서로에게 경력직(?)이니까 웬만한 일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대로 쭉 환상의 팀워크만 발휘되면 참 좋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로 만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아는 사람’이라서 생기곤 했다.     


        ‘자요?’ 밤 12시, 친한 후배에게서 톡이 왔다. 이 시간에 후배에게 오는 연락은 95%의 확률로 도저히 혼자서 삭히려고 해도 감당 안 되는 ‘방송 작가적 분노’가 생겼다는 징조다. 나는 바로 전화했다.     


- 이 시간에 뭐야! 구남친처럼 지질하게 굴지 마!      


        내 투정이 끝나자마자 후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후배를 그 팀으로 데리고 간 선배는 몇 년 전까지 이미 여러 차례 같이 손발을 맞춰 일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후배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다시 한 팀이 된 후배는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확신에 찼던 기 대는 프로그램 준비단계부터 의문부호를 달게 됐다. 5년 만에 일로 만난 선배는 자기가 알던 선배가 아니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모범 답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매일 새롭게 생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후배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제삼자인 나에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럴 때마다 후배는 내게 전화를 해왔다.     


        첫 상담(?)이 4달 전부터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간간이 이어져 왔으니까, 그날 일이 순간적으로 감정 조절을 못 해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욱한 마음보다는 인내심이 한계치를 넘어 그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저절로 안전핀이 뽑혀버린 것 같았다. 내가 봐도 화날만했고, 나였어도 대폭발 할 만한 일이었다. 상식선에서 일리 있는 말을 한 후배가 잘못한 일은 크게 없어 보였다. 후배의 이야기는 한 챕터가 끝날 때까지 1시간이 걸렸고, 그다음 챕터로, 또 그다음 챕터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녀도, 내가 알던 후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근데 있잖아, 네가 말하는 너도 내가 알던 네가 아니야...!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던지 후배는 다시 한번 반박했다.     


- 언니, 그렇다고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듯 말을 쏟아내고 나서 마음이 불안할 때 사람들이 찾는 말이 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나는 그것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님을 본인이 가장 잘 알아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으니까.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사회생활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가 알아서 ‘사바사’ ‘케바케’로 분석하고 적용해서 풀어가야 하는 자기 주도형 학습이니까. 문제는 ‘케바케’는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레 적립되는 스킬인데 반해 ‘사바사’는 그야말로 난제. 오랜 시간 겪어온 사이라서 늘 근삿값을 찾았던 데이터도 한 번씩 ‘오류’라는 판정을 받을 때가 있었다. 어쩔 때는 오류가 끝내 수정되지 못하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 관계가 폐기 처분되기도 했다.     


        특히 ‘아는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은 ‘내가 알던 너’나 ‘나를 아는 너’ 그중에서도 서로가 기억하는 화양연화에 멈춰있을 때 발생했다. 모르는 사이일 때는 서로의 기대치가 ‘기본값’이었다가 아는 사이가 되면서 각자의 '주관적인 추정 값’으로 바뀐다. 추정 값은 관계가 지속되면서 변하지만 보통 상대방의 데이터만 ±로 수정할 뿐 ‘본인의 변화치’는 잘 반영하지 않는다. 거기다 관계의 공백기까지 있었다면 ‘시간 보정’을 해야 하는 데도 과거 기억을 믿고 생략한다. 기억이란 그대로 간직되지 않고 서서히 미화되는 법. 당연히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착오 속에 만들어진 오류는 실망이나 원망의 빌미가 되어 관계의 틈을 서슴없이 비집고 들어가 갈등을 만들었다.     


        ‘내가 아는 너’는 나의 막연한 기대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므로 내 기대가 무너졌다고 모든 잘못을 상대에게만 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섭한 마음을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을 때 ‘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나의 기댓값’을 방어했다.       


        아는 사이에서는 ‘입바른 말’이 더 뼈아픈 법. 나의 방어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공격이 됐다.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또 다른 갈등을 만들었고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이해해주지 못함을 탓하는 상대의 빌미가 됐다. 이 다툼에서 이기는 사람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할퀴기만 했을 뿐.     


        어쩔 수 없이 서로에 대한 기대를 접거나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줄곧 그 선택을 ‘포기’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욕심이 나나, 그 사람을 더욱 괴롭혔다. 하지만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계속 간직할 것은 남기고, 버려야 할 것은 정리하는 ‘마음의 취사선택’.   

  

오히려 그 편이 좋은 사람으로만 기억하려고 할 때보다 진짜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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