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높은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말을 알코올 중독 수준이 너무 심각하다며 자신을 나무란 의사에게 했다고 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노랑을 보기 위해 자신을 속이며 압생트를 계속 마셔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중.
활활 타오르는 노랑을 봐야 했던 사람이라. 주어가 없지만 저 부분만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한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받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다. 계속 다음 장, 그다음 이야기를 읽는데도 ‘스스로를 속일 필요’에서 한참이나 마음이 멈춰졌다. 이런 대가에게도 자신을 깎는 노력이나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고 생각하니 인간적인 동질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반 고흐가 그랬듯, 우리 역시 자신을 속일 필요가 어느 정도는 있다고 본다. 특히나 사회생활, 인간관계라는 굴레에서는 남이 아니라 자신을 잘 속이는 것도 능력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능력이 많이 부족했거니와 키울 생각도 하지 않아서 꽤나 고생을 했다. 그래서 나의 20대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나 맞고, 틀리고’를 두고 나는 매번 방황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이 ‘언행일치’였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맞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은 어렵고, 싫었다. 어쩌다 하는 거짓말도 잘 들키곤 했는데, 아마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하지 못했던 데다가 ‘포커페이스’가 안 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세상살이가 이론적으로 배운 것과는 '많이' 다르고, 생각대로 할 수 없는 일 투성이라는 것. 솔직한 게 죄는 아니지만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나치거나 혹은 올곧기만 한 나의 솔직함이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왕왕 있었다. 특히 일에서만큼은 많았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 없는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현실에서 나는 '불편한 사람'에 가까웠다.
'밥벌이'라는 것이 하고 싶은 일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 어쩔 수 없이 고흐처럼 자신을 속여야만 하는 순간이 생긴다. 모두가 그런 순간을 피해 가면 좋겠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악역'을 맡아야만 한다. 누군들 왜 늘 '좋은 사람'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이 '악역'을 맡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기 전까지는 '악역'의 말 못 할 진심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회생활 시작 후 내가 20대 대부분을 반항아(!)로 살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작가 선배인 앨리스 언니와 나는 10여 년 전 같이 일했던 메인 작가 선배님을 두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배님한테 우리는 참 힘든 후배들이었던 것 같다고. 말이 안 되는 PD의 요구(?)에도 선배님은 웬만해서는 '아니요'라고 하지 않았다. 선배님이 '네'하고 받아들일수록 후배인 우리의 일은 늘어만 갔다.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더라도 우리 목소리를 내주지 않는 선배님이 이해되지 않았고, 원망스러웠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섭외 펑크. 당장 대타를 섭외해야 했다. PD는 그 후보로 당시 가장 잘 나가는 한 스타를 원했다. 선배님은 거절 없이 PD의 말 그대로 우리에게 섭외 지시를 내렸다. 대타 자리에 대스타를 섭외하라니. 어이없는 마음을 주저 없이 쏟아냈다.
- 녹화가 내일모렌데, 누구를 섭외하라고요?
말도 안 돼요.
과연 선배님은 말이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몰라서 YES라고 했을까. 아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지만 그에게도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것은 늘 있었다.
입바른 얘기를 할 때 하더라도 '곧바로' 반격(!) 하지는 않는 게 좋다. 딱! 5초만 늦게 반응해도 상처 주는 일은 훨씬 줄어들었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든, 내가 납득하기 위해서든, 이유는 필요한 법. 5초는 '왜 그래야 하냐'라고 따져 묻기 전에 '왜 그래야 했을까' 먼저 상대 입장에 생각이 머물 수 있게 했다. 물론 5초라는 시간이 억지 '자기 합리화'나 '정신승리'뿐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부캐'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처세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슬픈 것은 마지못해 자신을 속일 일은 생각보다 너무 자주 있다는 것.
말이나 행동이 곧 그 사람의 모든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관계가 피곤(!)한 건,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진심을 스스로 잘 가려내야 하기 때문. 사실 중요한 건 그 사람의 진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를 해석하는 내 마음에 따라서 그 사람은 천사일 때도, 악마일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 오로지 내 생각대로, 방식대로 그 사람을 단정 짓지 말 것. 내가 그렇듯, 그 사람도 잠시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중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