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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Nov 09. 2021

당신의 배려가 무시당하는 이유.

         내 인생에서 ‘나한테 이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라고 느꼈던 사람이 있다. 인생 통틀어 한 명이라기보다는 분야(?) 별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고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한도 끝도 없다. 그중에서 ‘매너’ 끝판왕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배려와 친절은 내가 지금까지 받아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그 후로도.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너무 말라서 바람에 불면 날아갈 것 같아, 귀여워! 연예인 누구 닮은 것 같아,라고 그 사람은 자주 말했지만 나와 나를 보는 여느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귀엽지도 연예인을 언급할 만큼 예쁘지도 않았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몸무게의 소유자였고, 조금 더 너그럽게 봐준다고 해도 절대 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는 표현을 쓸 만큼 여리지 않았다. 다만 골격이 큰 체격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팔목 뼈가 유난히 도드라지게 가늘어 보였다.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발목과 달리 팔목은 노출이 잦을 뿐 아니라 발목에 비해 시선 두기도 막막하지 않은 관계로 그 사람은 종종 내 팔목에 시선을 쉬어가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늘 안쓰러워했다. '그냥 잡아도 부러질 것 같아'라고. 뭐, 그의 생각은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다. 입 밖으로 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로 옮기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리액션이라는 것이 여간 어정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를 때 짧은 치마를 입은 나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허리에 묶어준다거나, 술자리에서 흑기사를 자처하고, 만원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 남자들 사이에서 나를 보호하고, 길을 걸을 때는 늘 안쪽에 서게 하는 등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한 행동은 특이할 것이 없다. 그저 나라는 사람을 유난히 특별하게 봐줬을 뿐. 그럼에도 내가 그 사람을 1N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다. 우리는 한 프로젝트 때문에 만났고, 처음부터 그녀가 레즈비언이란 것을, 내가 이성애자란 것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직접적으로 밝힌 적이 없으므로 그녀의 마음 끝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른 채로 있다. 그녀 입장에서는 오직 진심과 순수, 그 외에는 없는 마음이란 것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은 매 순간 불편했고,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 중 어느 것도 내가 원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려는 왕복이 아니라 편도 행 마음.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서’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이지만 돌아올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배려란 상대방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중 하나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가능한 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기대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바라는 것 또한 없을 때 배려는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배려는 종종 목적을 헷갈리고 만다. ‘너를 위해서(?)’ 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도 해달라고 보챈다. 돌아올 무언가를 기대하는 순간 배려는 변심을 하고 욕심이 된다. 그래서 배려의 마지막이 안타깝게도 ‘개수작’으로 남을 때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에서 끈이 풀린 내 운동화를 발견하고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 리본을 묶어주던 남자도. 괜찮다고 계속 거절해도 새우를 까고, 키조개를 자르고 일일이 내 접시에 올려주던 남자도. 짠돌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도 만나면 내가 돈 한 푼 못 쓰게 만들던 남자도. 골초면서 힘들게 흡연을 자제하던 남자도. 그들의 매너를 나는 배려라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이 나에게 고작 개수작에 그쳐 버린 건 내가 원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품은 흑심(!)을 너무 빨리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은 비록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어도 분명 배려였다. 내가 그렇게 기억하는 데에는 그녀가 끝내 ‘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고백. 훗날 누군가에게 ‘그땐 그랬지’로 전해 들었을 때, 눈치챘음에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미안함보다 고마움을 느꼈던 것은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슬픈 노력인지 알아서였다. 나 역시 그래 봤으니까.          


        나에게는 최선이, 상대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돌아오는 게 없다고 해서 억울해 해지 않는 게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좋다. 그러고 보면 배려라는 건 처음부터 상대를 위한 마음이나 행동이 아닌 것 같다. 그저 내 마음일 뿐이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는 최고의 ‘착한 노력’에 불과한 게 아닐까. 아무리 착한 노력이라도 '내 마음'이란 건 상대방이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쉽게 보이지 않는 법. 그래서 배려는 철저히 무시당할 수 있다. 


당신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처음부터 가련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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