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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Dec 10. 2020

어떤 고백은 다시 못 볼 사이라서 가능하다.

서로 다른 마음의 속도

        나는 인간관계의 시작에서 그랬던 경험이 있다. 나는 그저 '이 사람 나쁘지 않네' 정도일 뿐인데, 상대가 나에게 보이는 ‘그린 라이트’가 너무 빨라서 당황했던 때가. 한마디로 관계 진전 속도가 나와는 다르게 빠른 사람을 나는 못 견뎌했고,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내가 그런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내가 첫눈에 반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다! 그래서 모른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누군가를 알아가고, 친해지기 위한 마음의 예열 ‘시간’이 필요한 사람. 거기다 지금껏 해왔던 ‘마음의 준비운동’을 생략할 용기 또한 없었다. 가능하다면 천천히 알아가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겪어보지 않은 마음의 속도로 나에게 달려오는 사람은 불편했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인간관계의 속도가 느린 건, 오로지 내 마음이 신중해서일까? 반은 맞고, 반은 핑계다. 상대보다 느리다는 것을 알았다면 내가 속도를 올렸으면 될 일. 나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관계에서는 후진을 하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너무 분명했기에 내 마음이 아니다 싶으면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따지자면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인간관계의 적정 속도는 ‘신중함’과 ‘의지’가 7:3의 비율로 섞인 딱 그 정도가 내가 원하는 황금비율이었다.     


- 너는 모르겠지만. 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 정도로 잘하지 않아.

  근데 내가 지켜보니까 너 참 괜찮더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8년 전, 한 프로젝트를 끝낸 쫑파티 자리에서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그냥 ‘일적으로’ 알고 지내면 손해 볼 것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그녀의 말은 ‘급발진’에 가까웠다. 일적인 관계로 그어둔 선을 그녀가 넘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지금껏 큰 오류 없이 적용되어 온 내 인간관계의 공식에 따르면 그 순간 나는, 후진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에게는 선을 그었던 내 마음이 미안하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솔직함을 앞세워 자신의 아주 사적인 고백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게 된 지 고작 2주. 그 사이에 일 얘기만 했을 뿐,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지나면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보다 평생 못 보고 지낼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 고백에 무너졌다.     


        철저하게 내 기준에서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것. 내가 그녀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했을 뿐, 그녀에게 나는 어쩌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거라고 생각했다. 내 심장이 툭! 떨어졌던 건 그녀에 비해 너무 가짜였던 내 마음이 미안해서였다. 나는 내 마음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녀와 같을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나란히 달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정말이지 모든 순간 진심을 다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얼마 못가 멈춰졌다. 시동을 일방적으로 끈 것은 나였다. 내 진심에 비해 그녀의 마음이 가짜라고 생각된 어느 날이었다.     


        얼마 전 내 마음의 크기가 그 정도인지 몰랐다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었다. 몰랐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아니, 억울했다. 분명 마음을 먼저 보여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그걸 차치하고라도 함께한 시간 동안 내가 쏟은 진심이 그녀에게 아무 울림도 되지 못했다는 건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때로 어떤 고백은 다시 못 볼 사이라서 가능하기도 하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녀에게 그날의 이야기는 나를 믿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다시 못 볼 사이라서 가능했던 고백이었던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내가 오해했다. 철저히 내 기준으로만 그녀의 마음을 해석했다. 나의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관계.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인연의 시작도, 끝도 급발진한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인연을 정리하면서 나는 내가 일방적으로 상처받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잘못은 모두 그녀에게 있다고. 그래서 오랫동안 그녀를 원망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정해놓은 황금비율을 놓쳐버린 인간관계였다. 신중함은 온데간데없고. 내 멋대로 상대의 마음을 부풀려 해석하고, 오해하고. 잘하고 싶다는 내 의지에만 기댄 관계. 나는 그녀의 속도에 맞춰줬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영문도 모른 채, 그녀가 내 의지에 맞춰주다 흥미를 잃은 걸 수도 있겠다 싶다.     

 

        관계를 전처럼 되돌릴 의지는 더 이상 내게 없다. 비록 그녀에게 잘 전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지난날 내 진심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원망하기만 했던 미움 투성이 마음만큼은 이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 나, 인간관계의 적정 속도를 알려주는 어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때가 아니니, 절대 서행하시오. 서서히 속도를 올리시오. 성격이 급하니 무조건 시속 100km로 달려가시오. 지금은 과속 중, 잠시 멈추시오처럼. 거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관계의 유효기간도 휴대폰 배터리 잔량 표시처럼 알려주면 좋겠다. 그럼 섣불리 마음을 오해할 일도, 몰라준다고 상처받을 일도, 갑자기 인연이 끊길 일도 없지 않을까. 아... 내가 너무 쉽게 인연을 맺으려 하나?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나는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나의 속도로 당신에게 가기로 한다. 인연에서 영원은 없고, 끝은 또 올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이 오더라도 내가 할 원망도 후회도 최대한 줄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다시는 오버페이스 하지는 않으려 한다. 되도록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이 관계를 지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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