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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Oct 28. 2020

나는 나에 대한 연출을 멈췄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 없는 비흡연자다. 그런데 가끔 담배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업무상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고, 그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그가 ‘같이 담배나 피우러 가시죠?’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말을 건넸을 때,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눈에는 내가 ‘확신의 흡연자’로 보였다는 건데, 나로서는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못마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흡연은 ‘불호 중의 불호’라서 단 한 번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비흡연자라고 말하니 이번에는 그가 당황했다. 이 일을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나를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모 선배가 말했다.     


- 나도 처음에 너 골초인 줄 알았는데?     


        맙소사, 내가 골초 이미지라니...! 그러고 보니 담배로 받은 오해는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 누나! 내 가방에 담배 있는데, 한 개비만 꺼내 줘요.     


        뜯지도 않은 완전 새 담배였다. 주위에는 온통 비흡연자들뿐이라서 담배 한 갑을 제대로 본 것은 아빠의 금연 이후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 이거 어떻게 뜯는 거야? 

  이 은박 종이 찢으면 되는 거야?’     


        내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 아! 누나 담배 안 한다는 말이 정말이었구나?!     


        흡연이 감추고 말고 할 일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일 경우도 있었다. 그는 담배 안 한다는 내 말을 거짓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때 그가 의심했던 건 단지 흡연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내 진심이었을까?     


        한때 나는 ‘실제의 나’보다 ‘어떤 이미지의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는 때로 정확한 사실보다 ‘사실처럼’ 보이거나 받아들여지는 게 전부일 때도 있었던 탓이다. 사람들이 내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이미지로 볼 때면 여지없이 실망했다. 나름대로 ‘이미지 관리’라는 걸 했었으니까. 말이 '관리'지, 그건 내가 마음먹은 대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닌 말로 아무리 노력해봐야 각자 마음대로 재단하고 각색하는 나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심지어 나를 너무 좋게만 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지인들과 가벼운 술자리에서 그와 만난 지 고작 한두 시간 정도 됐을 때였다. 그렇게 빠른 고백을 나는 해본 적도 없었고, 받아본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진심을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아주 진지했고, 확고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그가 판단한 나는 내가 들어도 참 매력적이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당신 생각만큼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알았다. 사실을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아니라 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내 이미지만 타인에 의해 재단당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도 사람들을 내 멋대로 생각했다. 특히 연예인들에게 그랬다. 대본 리딩을 위해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 감당해야만 했던 어색함, 낯섦, 서늘함, 차가움이라는 공기. 지금껏 TV로 보던 따뜻하고 친절한 이미지와는 분명 거리가 생길 때도 있었다. 나는 그를 섭외한 제작진. 그러므로 그와 나 사이의 공기를 바꾸기 위해 애써야 하는 사람은 오직 ‘낯을 가리는 나’였다.      


- 나 되게 낯가려’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반응은 예외 없이 거의 하나다.      


- 네가?     


        그 뒤에 붙는 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누구는 너랑 안 어울려. 내숭 떨지 마,라고 충고했고. 혹자는 거짓말, 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그렇게는 안 보인다, 고 여지를 남겼다. 아마도 그렇게 말한 열 명 중에 한두 명을 빼고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내숭을 떨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오래가는 편이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만큼 사람을 가리는 탓에, 그들에게 나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인간관계의 폭이 한없이 좁아지는 부작용은 내가 감내해야 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쉽게 부정하나 생각했는데 그런 반응을 한 번, 두 번, 세 번 보고 나니, 나중에는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됐다.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는 사람들과의 처음이 어려웠고, 선택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낯을 가리는 사람’이 맞다고 판정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것일까.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설명하기 어려워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 줄 단어를 찾았다.      


        힌트를 얻기 위해 누군가 나서서 개인기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 오자, MC는 그날 초대 손님으로 출연한 연예인이 ‘잘할 것 같다’라며 기대에 차 지목했다. TV 속 그는 항상 웃는 얼굴에 밝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히 나도 이번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됐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는 몹시 난감해했다. MC가 그런 모습이 의외라고 하자 그는 말한다.     


- 많이들 저를 그렇게 보시는데,

  제 사회성이라는 게 

  일 때문에 길러진 사회성이라서요.

  사실 저는 사람들 만나는 것보다

  집에 있는 거 좋아하고......     


        일 때문에 길러진 사회성. 내 얘기였다. 낯가림이 심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피해 다니면서도 절대로 회피할 수 없었던 한순간이 있었다. 바로 나의 일, 방송을 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려 노력했다. 방송 작가인 이상 내게는 그래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내가 말하는 나를 부정했던 사람들 열에 아홉은 일로 만난 사이. 그들에게 보여줬던 나는, 내 안의 몇 퍼센트가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세계에서 데리고 온 나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결코 나는 볼 수 없는 나, 사람들이 보는 나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있게 됐다. 


        최대한 낯을 가리지 않으려고, 촬영 전날이면 잠들기 전에 내일의 나를 위해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혼자만의 리허설을 했다. 실제로 대본 리딩 시간이 되면 전날 연습했던 대로 내 안에 있는 온갖 너스레 총동원령을 내린 후 목소리 톤을 솔에 맞추고, 세상 친절한 미소를 장착하며, 다정한 리액션 봇을 대동해 방송 작가라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나의 애씀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별 소득 없는 사람도 있다. 호의적이지 않고 내내 냉랭한 태도를 보이면 나 나름의 애씀을 몰라주는 그들이 원망스러웠고, 서러웠다. 때로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미리 보내준 대본을 읽어 보기는 했을까, 지금 내 설명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걸까,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그래서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의문투성이로 시작된 촬영. 그런데 촬영만 들어가면 그들은 딴사람이 되었다. 완벽한 대본 숙지는 물론 미처 제작진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개인적인 역량으로 채워주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카메라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180° 다른 그들의 모습이 놀라워서 나쁜 의미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래야만 했듯 그들에게도 그래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나에게는 문밖이 또 다른 나의 경계이듯 그들에게는 카메라 앞이 그 경계선인 게 아닐까.     


        애석하게도 그들 또한 나처럼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을 오롯이 이해하고 동병상련을 느낀 것은 그들에 대한 오해가 나에게는 상처로 남았음에도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러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기억조차 흐릿해진 후. 내 안에 굳건히 자리 잡은 오류를 모두 바로잡고, 그들의 불명예를 빠짐없이 회복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넷플릭스 영화 <어쩌다 로맨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있잖아, 난 어릴 때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는 게 너무 겁이 나서 이런 튀는 게이가 되어서 잘생긴 게이 친구들을 따라다녔어. 난 그 애들을 웃기고, 갈만한 최고의 파티를 찾아주고, 실연으로 상처를 받으면 항상 위로를 해줬지. 하지만 아무도 몰랐던 게 뭔 줄 알아? 내 마음은 계속 상처받고 있었다는 것. 끊임없이. 그 애들이 어떻게 알겠어? 내가 보여준 적이 없는데...          


        내가 보여준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어쩔 땐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는 걸. 어차피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일에 괜한 에너지 쏟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관계는 있어도 소용없는 말은 없었다. 나의 고백이 소용없는 말이 된다면 달라질 것은 그가 아니라 나면 됐다. 그때야말로 가장 적절한 인간관계 손절 타이밍. 말보다 행동이 어렵다는 핑계로, 말을 뱉는 것을 평가절하하지만 생각해보라. 마음을 말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힘듦을 몰라주는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나만, 애쓸 필요 없다.     


        나에 대한 이미지는 생각보다 좋을 때도 있고,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도 있다. 뿌듯할 때가 있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몰랐던 나를 알게 될 때도 있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를 들킬 때도 있다. 그 많은 나에 대한 이미지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떠올리고 인정하는 나만이 온전한 나인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 조각조각마다 애써 부정할 필요도 너무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나에 대한 연출을 멈췄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도 그들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듯이, 사람들이 가진 나에 대한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마는 것 또한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는 일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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