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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04. 2021

그와 내 사이가 틀어진 이유.

'참는다'가 '참아준다'가 되면 생기는 일.

         ‘그거 하나만 빼고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말만 하면 무조건 한 사람에게서 어떤 하나를 뺄 수 있다고 제안한다면 사람들은 나의 어떤 하나를 지목할까. 처음에는 다들 난감해하겠지. 누군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말할지도. 난감해하는 사람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나를 위한 선의.     


         그렇게 해서 모인 ‘나를 위한 선의’ 모두를 취합하면 열 개는 거뜬히 넘길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십 가지가 될 수도 있겠지. 아니면 공통된 하나이려나? 사람마다 지적하는 부분이 다른 문제는 ‘개인의 취향’ 차이일 테고. 아니지. 그 경우에 나는 단점 투성이인 사람이 되는 건가? 반대로 모두 똑같은 하나를 말하면? 그건 단순한 단점이 아닌 거잖아? 이를테면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건가?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다. 내 나이만큼 함께한 나라는 정체성이 있으니까 그중 불호도, 극불호도 있겠지. 그게 몇 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가정은 그저 나 혼자 벌이는 상상 파티일 뿐이다. 사실 의도치 않게 ‘그 하나’를 듣게 된 적은 있어도 물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나라서 벌어진 일을 사과하기 위해 나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일은 있겠지만 내가 먼저 상대를 ‘추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주 본격적으로 나를 파헤치기에는 혹여 되돌리기 힘든 ‘마상(마음의 상처)’이 될지도 몰라서 두렵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쿨해질 수 있는 조언.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당신과 나 사이에서 진작에 홀연히 사라진 그 말을 되살리고, 곱씹고, 몇 번은 부정하고, 여러 번을 자책하고. 혼자서 색종이 접듯이 마음을 접었다, 폈다 난리법석을 떨게 뻔하다. 그렇게 다친 마음을 셀프로 A/S 하다 보면 누군가에게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마음보다 ‘나한테 왜 그런 말 했어요?’라는 긴 원망이 우리 사이를 따라다닐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방송작가 5-6년 차 시절, 이력서에 써 내려갈 프로그램 숫자는 세네 달마다 추가됐지만 매번 새로운 팀 사람들과 짧은 시간 호흡을 맞춰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 무렵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힐링은 퇴근을 미루고 작가 선배와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캔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맥주 마시는 것도 좋았지만 이런저런 애로사항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말하자면 선배가 내 대나무 숲이었던 셈이다.     


- 글쎄 ‘별거 아닌 일에 왜 이렇게 화를 내냐’고 그러더라고요.

  참나! 내가 얼마나 참고, 참다 말했는데...     


        나는 나와 짝을 이뤄 일하는 PD가 업무에서 한 잘못에 대해서 선배에게 고발중이었다. 내가 먼저 그의 잘못에 대해 꺼낸 것은 선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심지어 사건(!) 당사자인 그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그때까지 오직 내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일이 겹겹이 쌓이다 내 인내력이 더 이상 그에게만은 연장 불가했던 상황에 이르렀을 때였다.     


- 게다가 오늘은 소품 리스트를 꼼꼼하게 정리해서 줬는데 

  빼먹었더라고요. 화가 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그랬죠. PD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냐고 처음으로 화를 냈어요.

  언니, 제가 잘못한 거예요?

- 아니! 네가 잘못한 건 없지...     


        분명 듣고 싶은 말을 들었음에도 선배의 말은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납득시켜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억울함을 가득 담아 말의 속도를 높였다. 속도 때문인지 언성은 자동으로 올라갔다.     


- 어이가 없는 게, 잘못은 자기가 했는데도

  제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다니더라니까요...     


        더빙 대본을 쓰는 것이 그 프로그램에서 내가 해야 되는 여러 일 중 하나. 문제는 작가의 더빙 대본은 결코 PD의 ‘편집’을 앞서 나갈 수 없다는 것. 편집이 끝나야 나의 일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빙 대본 쓰는 일은 편집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에 쫓기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그때 달랐던 편집 시간에 비해 더빙 시간은 오전 9시로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D가 편집에 더디면 더딜수록,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대기해야 하는 시간은 무한정 길어졌고, 반면 내가 대본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 작가님 오늘은 진짜, 진짜예요!     


        PD가 편집본을 넘겨주기로 장담한 시간은 ‘또’ 저녁 6시. 정작 그 시간이 되면 그는 약속 깨기를 하룻밤에도 여러 번 반복했다. 다시 밤 9시로, 다시 10시로, 잠시 후 12시로. 하지만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넘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꼬박 8시간 동안 편집본만 기다리다가 잠 한숨 못 자고 7시간 남은 더빙 시간에 쫓겨 대본 쓰기 바빴다. 그게 벌써 세 번이었고, 그의 스타일상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럴 거면 애초에 편집이 새벽 2시에 끝난다고 하면 제가 좀 자다가 써도 되잖아요, 라는 말이 그때마다 목에 걸렸다. 공수표만 날리는 그의 대처에 화가 났지만 더빙 시간에 맞추기에는 이미 시간이 부족했다. 화를 낼 시간에 한 줄이라도 빨리 써야 했다. 무엇보다 그가 게을러서 편집이 늦어진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지키지도 못할 호언장담보다는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나를 위한 배려를 바랐다. 다음에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으로 서운한 마음을 담은 말을 꾹 참아왔다. 그런데 소품 실수까지 생기자, 참아왔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 근데 네가 참고, 참았다는 사실을,

  그 사람도 아니?     

아니, 언니! 자기가 지금까지 한 행동이 있는데... 

  상. 식. 적으로!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선배를 바라봤다.     


- 아마 모를걸? 말하지 않으면 몰라.

  거기다 ‘상식’은 사람마다 다르거든.

  그 사람이 보기에는 지금까지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그것도 ‘별거 아닌 일에’ 너무 화를 내는 거 같지 않았을까?

  사실 소품은 다시 준비하면 되잖아?     


        선배의 말과 함께 지난 5-6년 동안 억울하다고만 생각했던 나를 향한 원망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말하자면 이런 거야. 화를 내야 할 때 안 내고

  이상한 포인트에서 화내는 사람이 된 거지.

  잘못은 상대방이 했는데도 너만 이상해지는 거?     


        선배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정당한(!) 화라고 할지라도 아주 적당한 타이밍에 그것도 현명하게 내야 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 내가 보기에 너는 정말 괜찮은 아이다?

  선배로서 내가 안타까운 건,

  너의 그 단점 하나가 다른 여러 장점을

  안 보이게 만들 때도 있다는 거야.          


        작가로서 업무상 실수는 되도록 하지 않는 편이지만 때로 예측 불가능이라 함께 일하려면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나였을까. 돌아보면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참는다는 일을 10번 사면 한 번은 무료로 주는 커피 쿠폰이나 칭찬 포도 스티커처럼 여겼다. 혼자서 배려, 인내 등을 꼬박꼬박 적립하고 이쯤 했으면 화낼 자격이 있다고 ‘내가 나에게’ 말했다. 과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포도 스티커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내가 놓친 ‘참는다’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내가’ 또는 ‘나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100% 나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상대방만을 위한 행동이었을까. 거기에는 분명 간단치 않은 여러 생각과 계산이 섞여 있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물론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까지도. 참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말로도 하지 않는 것. 내가 참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숨어있는 나의 배려를 눈치채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내 인내를 몰라준다고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은 참는 게 아니라 ‘참아 준 것’. ‘참는다’는 게 ‘참아준다’가 되면 안 됐다. 여러 선택 중에서 내가 나에게 강요했을 뿐 그 사람은 참아주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너의 그 단점 하나가 다른 여러 장점을

 안 보이게 만들 때도 있다는 거야.     


        선배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곱씹고, 사라지면 되살렸다. 한 번도 들을 각오를 하지 않은 말. 부정하지도 자책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와 내 사이가 틀어진 데에는 그의 잘못뿐 아니라 나의 부족함도 있음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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