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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22. 2022

게으름 끝판왕인 내가, 실은 완벽주의자?!

- 그래서 대본은 언제까지 써야 돼요?

- 저희야 빨리 주시면 좋지만 작가님 시간에 맞출게요.

  얼마나 걸릴까요?

- 아... 아니요.

  그냥 데드 라인을 정해주시는 게, 저는 편해요.          


        시간을 마음껏 쓰라는데, 그걸 거절하는 사람. 바로 나다! 만약 나에게 어떤 일을 처리할 기회가 100번 주어진다고 한다면 나는 99번을 미루고,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마지막 백 번째에 마무리 짓는 사람. 그러니 나에게 주어지는 많은 시간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어차피 딴짓(?)을 할 게 뻔하니까. 신기한 것은 그렇게 수도 없이 미루면서도 여태까지 한 번도 데드라인을 넘긴 적은 없다는 것. 늘 시간에 쫓겨야 일을 시작하는데 마감 기한을 어긴 적도 없는 뭐, 약간 이상한 스타일이랄까.          


        어렸을 때도 나는 줄곧 그런 편이었다. 엄마가 출근하면서 방 청소를 해놓으라는 명령을 내리면 나는 버틸 대로 버티다가 엄마가 돌아오기 1시간 전에 부랴부랴 방 청소를 ‘시작’했다. 이런 나를 엄마는 게으르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한 번도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게으른 아이'인 것 같았다. 그만큼 뭐든 미리 하는 법이 없었고 닥쳐야 하곤 했다. 특히 학창 시절 시험 기간은 나의 게으름이 그야말로 피크에 달하는 때였다. 전날에서야 다음날 칠 시험 과목 공부에 매진했다. 그럼에도 다행히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종종 기대 이상으로 좋을 때도 있어서 벼락치기가 나한테 맞다고 확신했다. 마감 기한을 어긴 적 없듯, 그렇게 게으르면서도 지각과 결석 역시 없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설거지든, 청소든, 공부든, 대본이든 가능한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루면서 게으름 끝판 대장으로 살고 있다. 솔직히 이건 죽을 때까지 못 변할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내 스타일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기사를 읽었다. 심지어 게으름이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완벽주의자’여서 그렇단다.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그럴 리가!          


        심리학 개념 중에 ‘병적 꾸물거림(morbid procrastin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선택이나 과제를 앞두고 두려움과 부담감이 클 때, 당장의 업무가 아닌 다른 것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꾸물거리는 것으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일종의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걱정과 스트레스, 또 계획과 생각이 넘쳐나지만 이를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탈 벤-샤하르 교수는 그 이유를 이런 유형의 완벽주의자들은 결과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실패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으로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머, 정말? 이거 진짜 내 얘기인가.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자, 정말로 내가 완벽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완벽히 해내지 못할 일에 대해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이때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방어기제로 활용한다.     


- 너는 왜 자꾸 안 한다고만 해?

  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앨리스 언니는 전에 없이 나를 꾸짖었다. 마지막 프로그램 종영 후 몇 개월째 일이 없는 상태였고, 그런데도 선배가 추천한 두세 개 프로그램 작가 자리를 거절하고 난 직후였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거절한 이유는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잘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해보지 않은 장르의 프로그램이라서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못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데도 미리부터 잘할 수 없을 거라고 선을 긋고, 그 금을 넘지 않으려 반대 방향으로 계속 도망치던 시절이었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요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분명히 나는,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열 가지 가능성보다 안 해봤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고, 실은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결국 예상했던 것처럼 실패하더라도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한 이유는 언젠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나에게 물어본다. 자기 확신이 없어서 지금껏 많은 기회를 회피하고 도망치면서, 바라던 대로 완벽한 사람이 되었나? 오히려 점점 더 자신 없는 겁쟁이가 되지는 않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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