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부쩍, ‘너는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그전에는 보통 부모가 낳아준 곳에서 나서, 근거리 학교를 다니니, 묻지 않던 질문. 서울은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곳이기도 했고, 헤어지는 곳에서 으례히 ‘돌아갈 길이 머냐 가깝냐’를 묻는, 일종의 친절한 관습인 이 질문.
통화를 해도 우리는 묻는다. “어디야?” 아니, 어디면 당장 달려가 만날 것도 아닌데도, 우리는 그 질문을 습관처럼 한다.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가 ‘추운지, 더운지, 배고프거나 지친 상태는 아닌지’까지 아우르는 질문일 수도 있는,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질문.
대학 입학 후, 10년 동안 나는 학교 코앞에 살았다. 주거지가 아닌 캠퍼스 주변 동네 이름을 대답해야 하니, ‘너는 어디에’라는 질문이 때로는 피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여의도, 잠실, 마포, 반포, 쌍문, 목동, 건대입구, 망원동 혹은 김포나 인천, 광명 등 서울/경기 지역 주거지 어딘가를 대답하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은 나도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있는 안락한 집으로. 나 하나 달랑 살 수 있는 세간살이를 겨우 갖춘 원룸, 오피스텔이 아닌, 더 많은 불을 켤 수 있고, 체온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거주하는 어떤 곳으로. 때로 마음이 지치거나, 앓는 날이 오면, 그런 그리움은 깊었다. 나의 집은 왜 멀고도 멀어야 할까.
대학 시험을 치러 올 때도 그랬다. 미국은 워낙 땅이 넓어 그렇겠지만, 서부의 대학에서 동부까지 학생을 선발하러 대학이 움직인다던데, 우리의 비서울권 학생들은 하루 전날 반드시 집이 아닌 불편한 어딘가에서 잠자고 일어나 시험을 보러 간다. 어딘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느끼거나, 억울함이 있었던 지난 시절들도, 이 질문 앞에 늘 먼지를 일으키며 내게 달려왔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왔다고 하면, “부모님은 농사 잘 되시고?”하는 대답이 돌아올 때도 꽤 되었다. “아니 어르신, 그곳은 00산업으로 나라를 먹여 살리는 도시이고, 도시 전체가 반듯반듯한 곳으로...”라고 속으로 깊게 떠들다가, “서울 촌놈이시네.”라고 혼자 결론을 맺으면서도, 나도 서울 어딘가를 나의 터전으로 살날이 올까, 아니,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역부족일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디 한 번 부딪혀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마음이 가득해지면, 그 달뜬 마음만으로도 의기충천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주인공을 파멸로 치닿게 하는 장면은 사소했다. 바로, ‘자존심을 건드는 일’. 그것은 모든것을 망가트리는 방아쇠가 된다. 나에게 있어서 젊은 날, ‘너는 어디 사느냐’에 대한 질문 앞에, 나는 그렇게 조금 흔들렸던 것 같다. 태어난 곳,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것으로 인하여, 어린 인생의 삶의 영역이 대부분 결정되는 일은 어쩐지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나는 부모님이 서울 사람이 아니지만, ‘서울에 반드시 내 이름으로 내 터전을 마련해 보고야 말겠다’는 이같은 비장감이 내 안에 큰 소용돌이 인채로 있어왔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도 비무장 지대 탐방, 합숙 일정이 포함된 토론대회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 워낙 먼 곳이기도해서 그랬겠지만, 학교에는 나와 함께 그곳에 참가해줄 선생님이 없었다. 대도시에서 온 친구들은 꽤 많은 도서목록과 훈련을 거쳐 선생님과 그 자리에 와 있었다. 특목고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도시 일반 공립학교에서 온 친구들도, 나와는 다른 처지였다. 그 일이 나에게는 꽤 마음속에 남았던 것 같다. 소도시 태생인 탓을 하기 보다, 나 스스로 단단하게 준비해서 다음 해에 참가하면 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걸출한 학생은 아니었으니, 그런 환경에 영향을 받는 보통 사람의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달랐던 점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이 아니면, 넘어가는 자기조절을 위한 ‘적정한 무심함’으로 사는 부분을, 나는 이렇게 반드시, 짚고 넘어가니 피곤한 노릇이었다. 나는 ‘맨땅에 헤딩을 해서 코를 깨부숴 보고야, 맨땅을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며 나오는 식’으로 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아주 무모한 인간이다.
2.
어느 햇살 좋은 5월의 아침, 나는 강남역 모처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해서, 일찌감치 그 앞에 서있었다. 시간에 임박해 약속 바꾸기를 잘하는 바쁜 친구였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이미 길 위에 서있는 나에게 약속 취소 통보를 해왔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좋은 날씨에, 놀이공원이나, 공항처럼 긴 줄을 서서 어딘가로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저 줄은 무엇일까. 어디에 가든 행복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였는데, 그 행렬은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교회로 들어가는 사람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형교회’였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왜 저렇게 뙤약볕을 견디며 줄을 서서, 지하 깊숙이 들어가는 지, 그 순간 알고 싶었다. 마침 시간도 남았기에.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기독교인 대통령 후보자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의 전도도 없이, 나는 그 긴 줄 끝에 서서 교회에 처음 걸음하게 되었다. 그날 예배당에 울려퍼진 모든 찬양들이 나를 위한 가사들 같았고, 그렇게 한참을 울며, 위로 받고 그곳을 나왔다.
신이 있다고 했죠? 그럼 저의 질문을 해결해 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왜 서울에 살아서 편히 시험 보는 학생이 있고, 이렇게 교회 바로 앞에 살면서 충분히 쉬고 오는 사람이 있고, 저처럼 멀리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서 와야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당신이 정말 있다면, 내 부모가 여기에 살지 않아도, 내가 죄짓지 아니하고, 이곳에 사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살 수 있다고 응답해 주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말하며 살겠습니다. ‘누구나 꿈꾸면, 그 꿈을 이뤄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주 되바라진 기도를 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마음이 가는 일은 ‘땅밟기’를 했다. 그렇게 종잣돈을 모아, 첫 신혼집을 지방에 마련했다. 그리고, 그 ‘종자돈을 딱 두 배씩만 불려 가보자’ 마음먹었고, 거주비가 싼 지방에서 세살이를 하며, 대도시에 전세를 끼고 집을 사고, 시세 차익이 나면 팔고, 또 사고 팔기를 반복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에서, 가장 가파르게 오를만한 집을 사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저평가 돼있지만, 호재가 예상되는 지역, 급매를 찾아냈다. 부동산 사장님에게 수고비를 더 주겠다고 약속드리고, 좋은 매물을 선공개 해주기를 부탁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일들은 내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온몸 가득 엔돌핀이 돌게 했다. 오래 꿈꾸던 일들을 해나갈 수 있어서일 테다. (읽는 분들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대단한 투기꾼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내가 오래 살, 내 집 한 채 장만을 위해 고군분투 했던 것임을.
종잣돈이 많지 않은 신혼부부가, 부모님 도움 없이 대도시에 내 집 마련을 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래비용과 월세를 벌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없이 일했다. 너무너무 사고 싶은 물건은, 샀다. 그리고 바라보다 배송비를 지불하고 환불했다. 사기 전에는 간절했던 마음이, 결국 내 손에 들어오고 나면, 심드렁해지곤 했다. 갖고 싶은 물건은 물건 대신 그 브랜드의 주식을 사기도 하면서.
돈을 벌면서, 내가 거주하는 집은 월세에서 반전세가 되고, 결국은 전세가 될 것이었다. 등기를 쳐둔 집값이 오르면서 (세입자로부터 오른 전세값) 돈을 받아, 양쪽의 전세가가 등가가 되는 시점이 오면, 등기를 쳐둔 집은 비로소 내 집이 되는 것이다.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남편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나는 늘 그렇게 서울 모처에 등기를 치기 위해 관심이 쏠려있었다. 어떤 때는, 계약을 취소하려는 집주인에게, 다섯 시간 기차를 타고 온, 내 만삭의 배가 큰 무기가 되기도 했다. 가엾은 만삭에게 부동산이 나서 애써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했기에.
1억을 투자하면, 2억이, 2억을 투자하면 4억이 되는 것을 경험했다. 부동산의 가치는 정말 천 만 원 차이에도, 그 가격 안에 그 매물의 가치가 완벽하게 들어있다. 비슷하지만 살짝 비싼 매물은 나중에 가격 갭이 훨씬 크게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시장가격이 높은 물건은 당연히 기대되는 호재의 가치나 사이즈가 확실히 비교우위였다
.
물론, 운과 결단력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부동산은 계속해서 오르락 내리락 한다. 절대적인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후에 보면 또 기회는 온다. 내 경우에도, 대전의 집을 급히 팔고, (당시 서울 집값 폭등이 무서워서) 성동구에 급히 집을 샀지만, 한참 지나고 보니, 둘의 오름새가 비슷했다. 거래비용과 내가 쓴 에너지를 생각하면, 굳이 안 했어도 될 거래를 한 경우였다. 하지만, 사고팔면서 내가 서울 부동산에서 배운 것, 서울로 빠르게 이사오게 된 시기에도 영향을 미쳤기에, 괜찮은 거래였다고 정리는 했지만, 이처럼 기회는 만들면 언젠가 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무엇이든, 그 세계가 궁금하면 확인하고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다를까.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가능할까 아닐까. 보통 사람도 그것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좋은 일일까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갈 때, 나는 내가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 느낌이 퍽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