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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현주 Jan 26. 2024

약점에 공감하기 vs 약점을 착취하기





예민하고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은 바로 “타인의 약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초민감자, 엠패스들은 타인의 약한 면을 발견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감정 이입이 되어 배려하고, 돌보고, 도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경우 타인에게서 약한 점을 발견하면 자신이 물어 뜯을 기회로 여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으로 결핍을 충족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나르시시스트들이 대놓고 타인의 약점을 공략하고 물어 뜯으려고 한다면 공공의 적이 되고 자신의 목표 달성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지킬 앤 하이드” 같은 이중 인격적이고 자아 분열적인 연기에 들어간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하는 이해할 수 없고 병리적인 행동들에 “굳이 왜?“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이들의 미성숙한 방어 기제는 일종의 생존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와 같이 삐뚤어진 성인 아이들은 타인들에게서 약한 점을 발견하면 이때다 싶어 접근하여 여러 측면에서 착취하려고 든다. 타인의 약점을 공격하는 순간 이들은 강자가 되며 이것이 바로 이들이 쾌감을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에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며 공감을 요구하고 타인의 약점에도 “공감하는 척” 한다. “연민과 연결의 순간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낚시를 위해 미끼를 던지는 순간“일 뿐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초반부터 자신의 약점이나 상처를 드러내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전술에 마음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돌봐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에 평소보다 경계를 소홀히 한 채 그 사람을 지지해주려 한다. 이제 주도권은 나르시시스트에게 반 이상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 같이 기만적인 사람에게 속은 것도 약자이고, 아무나 믿는 것도 약자이고, 누군가 돌보려는 것도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인 척 코스프레를 하며 가면을 썼지만 실상은 자신이 강자라는 생각으로 은밀하게 상황을 즐기고 보다 그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렇기에 이들과 잘못 얽힌 이들의 삶은 점점 더 혼란과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어딘가 쎄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기미가 보이면 강도 높게 비난을 받고, 제대로 판단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몰아가는 ”가스라이팅 전략 (정서적 학대)“ 을 당하기 일쑤이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들이 이제는 가면을 슬슬 벗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드는 시점이면 이들의 기만적인 언행과 공격성은 한층 수위가 높아진다. 초민감자, 엠패스들은 이들의 가면 벗은 모습을 보고 도대체 같은 사람이 맞는지 충격에 빠지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이들이 정서적, 사회적 낚시질은 교묘하고 교활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짓밟는 데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사람들에게서는 제대로 정상적인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나르시시스트나 가스라이팅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는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이들의 은밀하고 교활한 전략들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는 아직도 나르시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참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상처 받은 피해자를 의심하면서 착취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오해하고 나르시시스트와 같은 편에 서서 온갖 책임 전가를 한다.  


이러한 끔찍한 상황을 겪고 거기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감도 잡기 힘들었다. 마치 끝이 안보이는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정신이 들었고 이 난장판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속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원히 속고 있을 수는 없었다. 회복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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