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라는 것을 처음 치러봤다. 이십대, 아직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닌 나이였다. 갑자기 장례식에 가야 될 일이 생기면 가는 내내 인터넷으로 장례 예절을 검색하기 바빴다. 흰 양말을 신어도 되는지, 운동화를 신고 가도 되는지, 맨얼굴로 가는 게 나은지, 향은 어떻게 피우는 건지, 절을 할 때는 오른손이 위인지 왼손이 위인지. 장례식이 3일에 걸쳐 진행된다는 것도 잘 몰랐다. 입관이 뭔지, 또 발인은 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망 시각, 밤 11시 42분. 다행히 임종은 지킬 수 있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엄마의 손발과 어쩐지 편안해지는 얼굴, 그리고 끝내 감지 못한 눈까지.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그리고 손에 담았다. 병원에서는 장례식장을 어디로 잡았느냐고 계속 물어왔다. 장례식장을 내가 잡아야 하는 건지, 그건 어떻게 하는 건지,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질 않았다. 서울의 나름 괜찮다는 4년제 대학 졸업장이 무색해지는 날이었다.
이모가 미리 들어놓았던 상조회사에 연락해 장례식장을 잡았다.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장례식장부터 시작해서, 몇 평짜리 호실을 사용할 건지, 상은 어떻게 차릴 건지, 꽃은 얼마나 할 건지, 과일은, 떡은, 일회용품은, 입관은, 발인은... 한편으로는 엄마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내 눈앞에 들이밀어진 갖가지의 선택이 왠지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냥 정신없이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리길 기도했던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보통 누군가 죽으면 3일장을 치른다. 3일장이라는 것은 사망 시각을 기준으로 72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인의 사망일자로부터 이틀 뒤에 발인을 한다는 뜻이다. 엄마의 사망 일자와 시각은 8월 14일 밤 11시 42분. 3일장을 기준으로 발인은 8월 16일. 조문을 받을 수 있는 날은 8월 15일 단 하루였다. 실질적으로 2일장에 가까웠다.
밤 12시가 다 되어 돌아가셨다는 말에 주변 어른들은 “엄마가 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에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해줬으면 했는데, 조문을 하루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웠다. 내 죄책감을 덜고자 4일장을 계획했었으나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3일장을 치르는 것이 돌아가신 분께 좋다고. 엄마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들이 하는 대로 3일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말이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했다.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내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루 조문을 받아보고는 깨달았다. 조문을 하루 받는 것과 이틀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그날 내 체력은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 “엄마가 너 고생 안 시키려고 그랬나 보다”라는 말이 절실히 와 닿는 순간이었다. 이게 사망 시각 밤 11시 42분의 의미였다.